"어느덧 당나귀의 등은 굽어 가고 딱딱해져 간다.
딱딱해질 때까지 피 나고 곪고
다시 새살이 돋고 파리들이 왱왱거렸다.
당나귀는 그것도 모른다.
자기가 아팠는지 딱딱해졌는지,
그가 꾸는 꿈처럼 처음 같은 색깔이고
처음 같은 피부일 거라고 알고 있다.

당나귀가 헤치고 나아온 게 짐인지 세상인지
시간들인지 손가락질들인지
파란 바다인지 새벽 안개였는지
차가운 냉대들이었는지 모른다.
당나귀에겐 그저 꿈이 중요하다.
아니, 집이 중요하다.
이젠 짐을 져서 꿈을 꾸는 건지,
꿈을 꾸기 위해서 짐을 져야 하는 건지,
그것도 모르겠다.
당나귀에겐 꿈도 집이고 질도 꿈이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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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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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알았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 프로젝트를 위해 글을 쓰려면 시간을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먼저 나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필멸하는 인간의 짧디짧은 수명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내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글을 써왔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언어‘라는 나의 불충분하고 때로 불가능한 도구가, 결국은 그것을 읽을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는 통로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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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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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판이 : (창문을 열고 숨을 들이쉬며, 혼잣말로) 더워 죽겠어. 답답해서 미치겠어. 여기선 정말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오늘은 화산 분화구라도 돼서 활활 불을 뿜어내어 모든 걸 깨끗이 불살라 버리고 싶어. 다시 얼음 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일생 한번 뜨겁게 불살라 봤으면 좋겠어. 내 과거는 끝났어. 희망도 죽어 버렸고, 흥, 난 이제 뭐든지 각오가 돼 있어.
와 봐, 날 미워하는 사람, 와 보라고. 날 실망시킨 사람, 내 질투심에 불을 지르는 사람고 모구 오라고. 너희를 기다리고 있으니.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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