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불행을 얇게 저며 펼쳐놓은것 같다. 얇디 얇지만 끈끈하게 빠져나갈 수 없는 지독한 굴레를 담담히 풀어낸다.환상소설이 떠오른다. 당연하고 평이한 현실에 서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장소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거짓현실로 바뀌지만 그 또한 현실이며 마술적인 장면의 전환이다. 그런데 한권의 책은 어쩌면 실제로 한 사람의 인생이고 그 삶의 정수일지도 모른다.참 묘한것 같지만 이 이야기들은 나직하고 새된 목소리로 담담하게 모든것을 말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절대 창백하지도, 지나치게 생동감이 넘치지도 않는 미색의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뿌리가 거세된 인간들은 애처롭게 떠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누군가에게 속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런 이 작가는 약간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들게 한다. 잠시 앞이 보이는것 같다가도 안개가 나를 스쳐지나가고 나는 갑자기 내 눈을 의심한다. 그러나 안개가 스쳐지나가는 그 절묘한 순간은 너무나 매끄러워 이전의 현실과 이후의 현실을 구분할 수 없도록 교묘히 엮어 놓는다.'돌아오가'까지 읽고서 이 책을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책은 환상소설집이다. 사실 나는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치 못했는데...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드디어 만난 나의 취향이다.젠장 이렇게 말끔하고도 무거운 단편들을 써내기 위해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펜을 들었을까. 글을 써내려가는 펜의 무게가, 키보드를 누르는 손가락의 무게가 천근만근이었을 것만 같다. 최근에 읽은 책들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아서 책을 읽다보면 답답한 마음 뿐이었는데 오랫만에 이야기 자체의 무거움이 내 폐를 짓누르는 책을 찾았다. 정말 숨죽여 아껴 읽었다. 그러나 계속 드는 생각은 가족한테만 다정하지 않는 나. 왜이리 어려울까. 가정에서의 학대는 보통 부모가 자녀한테 가하지만 나는 반대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왜 엄마에게 따뜻한 말, 조금의 기다림 없이 핀잔을 주고 화를 내는가. 그녀는 나에게 진심으로 사랑만을 주었는데 말이다. 어느날 나는 가족한테 화를 내는 사람들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나는 나에대한 분노를 사랑하는 가족에게 풀어내야 할만큼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인가. 나의 무심코 또는 일부러 던졌던 말이 우리 가족을 너무 깊게 찌르거나 베지 않았는지. 우리 가족은 '실수하는 인간'이 아닌데 내가 그렇게 만들고 있구나. 다른 한편, 나 또한 겨우 '실수하는 인간'인가? 이전까지 실수였던 아니었던 더이상은 중요하지 않다. 알면서도 계속 '실수'한다면 그것은 실수라고 할 수 없을터. 시간이 점점 빨리 지나가 이제는 한 해라는 시간도 해처럼 저물어가는 지금, 나는 올 해 읽은 책 중 최고의 책을 생각보다 빠르게 고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처음에 이 책을 빌린것은 드라마의 원작인 '너를 닮은 사람'을 전자책으로 읽었고 그 단편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단편이지만 나를 그 무엇보다 무겁게 묶어 버렸다. 그래서 그 이상 마음에 드는걸 찾을 수 없을것을 확신 하면서도 이 책을 빌렸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단편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카사레스에 우리의 비극을 섞은 느낌. 너무 한국적인 글은 나를 현실에 처박는것 같아서 거부하던 나에게 한국적이기 때문에 더 무겁게 와닿았던 소중한 이야기들.절대적으로 해설을 읽는것을 추천한다. 해설을 항상 읽지만 사실 정말 해설이 필요한가? 내가 소설을 읽는 그 순간 내가 느낀 그것이 나에게는 온세상일텐데. 그걸 깨내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스스로 어느정도까지 읽어낼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데 이 해설은 내가 느끼는 것을 언어로, 이론으로(?) 명료하게 집어준다. 감히 말하건데 아주 좋은 해설이다. 이 소설은 나의 세계를 한번 깨어야 할 정도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