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디 아더 피플 - 복수하는 사람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7월
평점 :
[세상의 모든 범죄자들은 합당한 벌을 받고 있을까?]
날이면 날마다 뉴스에서 전해지는 각종 범죄들.
매일 업데이트 되는 각종 흉악 범죄에 사람들은 분노하고, 그 범죄자들이 그에 합당한 벌을 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법조계가 결정하는 ‘처벌’이란 어찌된 일인지 ‘단죄’의 의미 보다는 가해자가 ‘불쌍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처음으로 그런 범죄를 저지른 원래는 나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심신미약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되기도 하는 등 어찌보면 ‘피해자’의 입장 보다는 ‘가해자’의 입장이 더욱 고려되어 매일 제출하는 가해자의 반성문들을 통해 처벌의 수위가 달라지는가 하면, 관습적인 판례에 따라 너무도 가벼운 처벌이 집행되면서, 정의를 원하는 평범하고 사회법규를 잘 지키고 사는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슬픈 상황이다. 도통 기준을 알 수 없는 판결과 어떨 때는 황당무계할 정도로 가벼운 형 집행에 ‘합법적 단죄’의 권한을 가지지 못한 평범한 시민들은 그래서 오늘도 충격적인 뉴스를 접할 때마다 청와대의 청원 게시판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이슈화를 시켜서 더 철저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피해자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정의를 구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보통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느 날 오후, 게이브의 아내와 어린 딸이 살인을 당했다.]
사람들은 매일 쳇바퀴처럼 똑같이 흘러가는 날들을 지겨워 한다. 이렇게 사는 건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닌데,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집과 직장만 왔다갔다 하는 이런 삶은 너무 지겠다 등 특별하고 즐거운 이벤트도 없이 흘러가는 인생을 따분해 하며 기계처럼 살아간다. 사람은 언젠간 죽으며, 끔찍한 사건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무시무시하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모르는 타인에게 만,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살고 있는 삶이 너무 평범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게이브도 열정적인 사랑을 한 후 가정을 꾸렸으나, 금새 그 사랑은 식어가기 시작하고 사랑했던 아내와는 이혼 일보 직전이었다. 그나마 딸로 인해 가느다란 끈으로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두르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을 뿐, 서로 그 실이 곧 끊어지리라는 것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퇴근길 교통체증을 겪던 중 앞차에 타고 있던 딸아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그 차를 뒤따르던 중 받은 전화 한 통. 그의 아내와 딸이 살해되었다는 전화. 이 전화 한 통으로 그의 삶은 송두리채 바뀌게 되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캠핑 트럭에서 길거리 삶을 산지 3년. 가족을 잃은 고통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날 만났던 ‘사마리아인’이라는 사람을 통해, 딸아이가 탔었던 그 차를 발견하게 되고, 그 차에 있던 물건들 중 하나인 수첩에 적혀 있었던 단어 ‘디 아더 피플’를 보게 된다.
[미성년자 가해자, 심신미약 상태의 가해자, 초범, 돈많은 가해자, 성폭행범....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범죄자를 누군가가 대신 처단해준다면? 단, 돈은 받지 않으며 다른 계획에 참여하는 것으로 반드시 갚는 조건이라면?]
다크 웹에서만 접속할 수 있는 지하 조직 ‘디 아더 피플’.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간 죄인을 대신 처단해주는 조직.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들, 죽은 피해자들로 인해 무너진 가족과 친구들의 삶 등을 고려해본다면, 굳이 성경의 출애굽기의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고려해볼만한 방법이 아닐까?
3년 동안의 무력하고 희망없는 삶을 살던 게이브는 하나의 단서를 시작으로 사건의 진실을 향해 파고들기 시작한다. 휴게소에서 매일 보는 금발의 웨이트리스, 자살 직전에 게이브를 살려준 사마리아인, 게이브의 장인&장모, 간호사 등 서로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주변인들의 사정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그 과정을 통해 알게되는 거짓과 진실과 연결고리.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어마어마 해서 모든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여러차례 생각못한 반전이 계속된다.
[스티븐 킹이 강력 추천하고, 아마존 평점 4.6점에 빛나는 스릴러.]
사실 스릴러 또한 국가 별 스토리텔링의 전형성이 있다. 일본 스릴러는 일본 스릴러의 틀, 영미 스릴러는 영미 스릴러의 틀, 유럽은 또 유럽만의 틀.
C.J. 튜더의 소설 ‘디 아더 피플’도 글의 형식에 있어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망망대해에 거대한 성긴 그물을 촤르륵 던져 놓은 다음, 조금씩 조금씩 줄을 당겨 수많은 작고 큰 다양한 물고기들 중에 천천히 걸러내어 결국은 큰 월척을 잡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중반부까지 이르러도 종잡을 수 없는 스토리의 전개,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드는 설정, 각 인물들의 연결고리의 독특함, 그리고 스릴러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한편으로는 시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적이기 까지도 한 인물과 사회에 대한 코멘트들이 돋보이는 독특한 책이다. 그리고 작가가 말한 것처럼 현실의 끔찍한 일들은 영화에서 처럼 ‘완벽하게 마무리’가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이 잃어버린 직소퍼즐의 조각들처럼 석연치 않게 마무리가 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그 또한 너무도 현실적이서 나름의 개연성을 부여해준다. 다산책방의 또 다른 스릴러 책인 #더원 보다는 신선함과 속도감이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이 책도 나름의 스토리텔링이 상당히 매력적인 편이다.
[염세주의자 같은 작가의 글...
하지만 인상적이었던 책 속의 문구들...]
“희망이 있었다. 약물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그런 종류의 비정상적인 희망 말이다. 그들은 희망 그 자체에 중독됐다는 걸 알면서도 코카인 파이프라도 되는 양 계속 뻐끔거린다. 사람들이 말하길 인간을 망가뜨리는 건 증오라고 한다. 아니다. 인간을 망가뜨리는 건 희망이다. 기생충처럼 안에서부터 갉아먹는다.”
“다들 돕고 사는 척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무리해가며 남을 돕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나 자기 염려라는 혼자만의 요새 안에서 살았다.”
“창작욕이 알코올중독처럼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포부를 미심쩍어했다. 그들 입장에서 남의 노력과 성공은 자신의 실패와 한심한 선택을 일깨울 따름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 조롱했다. ‘잘난 척하기는’, ‘으리으리한 졸업장 하나 받았다 이거지?’”
“물론 전부 헛소리였다. 새로운 시작 같은 건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굴레에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그것이 인생이었다.”
“가족은 팔자소관과 엉뚱한 의무감으로 한데 엮인 이방인에 불과했다. 가족은 선택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들을 사랑할지 여부조차 선택할 수 없었다. 그냥 사랑해야 했다. 그들이 어떤 진상을 부리건 간에.”
“세상에 자기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세상이 그 본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인생이란 망자의 길을 따라 천천히 기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많이 우회해도 결국에는 모두 한 방향으로 간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여정의 길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