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다시 강요의 문제로 돌아오자면, "진탕 마시고 속엣말 다 편하게 털어놓자" "취한 김에 비밀 하나씩만 이야기해봐" 같은, 조직된 ‘허심탄회주의‘를 강요하는 술자리도 질색이다. 나는 아직 준비도 안 됐고, 딱히 당신과 그럴 생각이 없으며, 그럴 만한 관계도 아닌데 따옴표를 확 열고 들어오면 "제가 털어놓을 속엣말은요…. 당장 집에 가고 싶어요" 말고는 할 말이 없어진다. 백지 위에서 쓱쓱쓱쓱 같이 뒹굴며 같이 뭉툭해지며 같이 허술해져가며 마음이 열리고 말이 열리는 건 일부러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상태이다.
비슷한 기질을 갖고 있고 비슷한 상태가 될 수 있는 나의 오랜 술친구들과 미래의 술친구들과 오래오래 술 마시면서 살고 싶다. 너무 사소해서, 너무 유치해서, 너무 쿨하지 못해서, 너무 쑥스러워서, 혹시 기분 상할까 봐, 관계가 틀어질까봐, 어색해질까 봐 같은 계산 다 던져버리고 상대를 믿고 나를 믿고 술과 함께 한 발 더. 그러다 보면 말이 따로 필요 없는 순간도 생긴다. 그저 술잔 한 번 부딪히는 것으로, 말없이 술을 따라주는 것으로 전해지는 마음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