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매우 번잡하면서도 고요하게 지나갔다. 얕은 그릇에 담긴 채 양달에 놓인물처럼 시간이 증발해버렸다. 세제와 파 뿌리 냄새와 물얼룩이 밴 우물가에서, 누가 오지 않는다. 궤짝에 담긴 조기 한뭇에 소금을 뿌리거나 하며 이순일은 생각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누가 안 와.순자야.하루는 고모가 부엌으로 들어서며 내일부터 이웃집에서 물을 길으러 올 거라고 이순일에게 일렀다. 한달에 오십원씩을 내고 우물을 빌려 쓰는 거라고 했다. - P119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돌아오지 말라고.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 P81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 P70
설거지하다 보면포크에 수없이 가로 새겨진 긁힌 자국,철수세미로도 지워지지 않은 잇자국,입에 음식을 넣는 일은쇠에 고랑을 내는 치열한 일이어서,포크도 숟가락도 상처투성이.상처 없는 밥이 없고고통 없는 기쁨도 없어,보드라운 하얀 빵도뜨거운 불길을 견디고 익어간 것을.그대를마주 앉아 천천히 밥을 먹을 때상처도 고통도 모락모락 증발하는햇살이 차려진 식탁 - P40
눈이 안 보이면 마음으로 보고입으로 말하지 못하면 눈으로 말할 수 있는데단지 도구(tool)가 없는 사람을왜 굳이 장애인이라 구별해 부르나돈을 신성시하는 사람배려가 결핍된 사람남이 아픈 건 모르는 사람그런 사람도 사람이라고 하면서 - P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