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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셋 2025
김혜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삶을 내일로 보내는 방법
주제가 하나로 일축될 때, 그것도 보편적인 소재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나오는 법이다. 셋셋 2025의 의의는 바로 이 편견을 깨는 데 있다. 앤솔러지라는 특성을 십분 살려, 단편마다 제각기 다른 목소리와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여름방학」
과거 한 조각이 현재의 고통을 상쇄해주기도 한다는 것을. 좋았던 한때의 기억으로 지난한 세월을 견딜 수 있다는 말을 청소년기에는 믿지 않았다. 오늘, 지금 행복해야 하는 줄 알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삶을 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건 어리숙함에서 온 오해였다. 삶은 기쁜 날보다 무료하거나 우울한 날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남다르게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유독 마음에 남는 기억 하나만 있으면 이걸 곱씹으면서 오늘을 버틸 수 있었다. 어쩌면 내일까지도. 하지만 이 사실을 알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은진은 소설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응어리를 품고 있다. 예전 엄마의 나이가 되어 그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고, 구원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 헤매기도 하지만 이 문제도 저 문제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어쩌면 구원은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속삭인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은진은 학생 때 어느 날로 돌아갈 것이다. 세희와의 순간을, '도깨비말'을, "아직 시간은 많아"하고 달래던 손을 떠올릴 터다. 과거의 미완의 이야기와, 현재의 미해결 된 이야기 속에서 은진은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다. 구원을 아직 찾지 못 했고, 영영 찾지 못 할지라도 계속 찾아 헤매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것이 삶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따분한 진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종의 구원이지 않을까.
사실은 엄마가 사 온 테이프가 앞부분만 짤막하게 녹음되어 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는 빈 테이프였다는 것. 하지만 엄마는 그걸 버리지 않고 테이프에 성경을 읽는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다는 것. 그걸 보면서 나는 엄마가 찾아 헤매고 있고, 찾았다고 생각하는 구원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 그걸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엄마를 위하는 마음에 아무 말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서 나는 여전히 나의 구원을 찾고 있지만, 어쩌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것, 것, 것.
「여름방학」, 38쪽.
「아이리시커피」
여러 단편 가운데 단연 시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폭력과 방관이 사회 현상으로 대두되는 이때, 누군가는 짚고 나서야 할 문제를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 여성 대상 범죄를 소재로 하고 있는 만큼 서사의 일면이 무겁고 어두울 수밖에 없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현실의 암적인 요소를 외면하지 않고 적확히 직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아이리시커피」는 범죄의 고통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구원'이라는 셋셋 2025 키워드에 걸맞게 '남아있는 사람들'을 조명한다. 사건 이후에도 이어지는 삶,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가는 삶이 여기 있다. 때때로 우리는 비극이 일어나면 그 참상과 가해자에 대해 집중하고는 한다. 그러나 기실 주목이 필요한 것은 생존자와 피해 유가족일지도 모른다. 느리지만 언젠가는 일상으로 돌아가, 주어진 시간을 살아갈 사람에 대한 묵묵한 연대의 마음이 이 단편에 실려 있다.
"식사는 하고 오셨어요? 같이 좀 드실래요?"
소미 엄마의 말에 희수는 문득 허기를 느꼈다. 하지만 선뜻 먹겠다고 해도 되는 걸까. 망설이는 사이에 소미 엄마가 라면 한 봉지를 더 꺼냈고, 금세 두 사람 몫의 수저가 거실 낮은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는 희수에게 소미 엄마가 베이지색 방석을 건넸다.
"거기서 계속 일하려면 힘드시겠어요. 매일 생각날 텐데."
누군가 자신을 부드러운 손길로 토닥여준 것 같았다.
「아이리시커피」, 135쪽
만약 구원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초월적인 존재보다 평범한 인간 곁에 있을 터다.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누군가 쥐어줄 수 없는, 나 자신이 직접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기에. 현대 사회에서 구원이란 본래 뜻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우리의 삶 끝에 구원이 있다고 믿을 뿐이다. 이는 일견 허망하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구원을 바라며 삶을 내일로 이어나가는 행위는 그 자체로 더없는 구원이다.
* 괴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