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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 - 개발과 손익에 갇힌 아름드리나무 이야기
김양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평점 :
나의 거목, 나의 대장을 내일로 보내기
유년 시절 살던 동네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었다. 은행나무는 언제나 너른 품을 자랑하며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이자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나도 은행나무의 품에서 자란 꼬마 중 하나였다. 그 앞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기도 하고,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으며, 맷집 좋게 나무의 오돌토돌한 부분을 딛고 오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은행나무를 친구로 생각했다. 나무를 '대장'이라고 부르는 친구도 있었다. 놀 때마다 빠지지 않는 존재였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따 대장 옆에서 봐' 하면 거기가 어딘지 모두가 알았다. 어느 날 전학을 가게 되면서 더는 추억을 쌓을 수 없었지만, 이따금씩 그 시절 우리의 대장이던 은행나무가 떠오른다. 이번에 『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을 읽으면서 '대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대장은 여전히 든든한 거목으로 남아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물음에 입맛이 썼다.
매년 명절이면 서울과 청주를 오간다. 지금은 버스 전용 고속도로를 달리지만, 부모님 차를 타던 날이면 늘상 지나치는 길이 있었다. '길에 선 나무' 챕터에 나오는 청주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 바로 그것이다. '경부고속도로 청주 나들목'이라는 설명을 듣고 단박에 알았다. 여기 자주 가던 곳인데. 하지만 사진으로 보는 가로수 길은 다소 낯설었다. 그도 그럴 게,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은 나에게 있어 영화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에 나올 법한 녹음이 무성한 장소였다. 도로 양 옆으로 초목이 우거져있어 마치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장소로 통과하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반면 사진 속 가로수 길은 어딘가 초라해보였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늙어가는 나무는 기백과 운치가 있는데, 이 나무들은 생명력을 도둑 맞은 듯 허름했다. 왜 그런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베려는 사람의 손이 닿으면 그랬다. 본문에서 한 환경운동가는 말한다. "오래된 나무가 있다는 건 그 나라나 도시의 품격을 말해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관리를 못해서 고목들이 고사해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합니다. (예전엔) 마을마다 당산나무가 있었잖아요. 큰 나무를 베면 사람이 죽는다고 나무를 아끼던 나라인데, 가로수 길에 처음 심은 70~80살 고목이 몇 그루 남았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로수를 생명이 아닌 시설물로 보는 거죠. 그런 낙후된 인식을 바꾸어야 하는데…." (본문, 76쪽)
교통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실리보다 더 먼 미래까지 가닿을 가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한 번 베면 그만인 가로수 길 나무가 아니라 그 안에 켜켜이 쌓인 나이테를 마주해야 한다. 나무가 두른 테 하나에 작게는 개인의 추억이, 크게는 지역의 역사가 담겨져있다. 다음 세대로 넘겨줘야 할 것은 보다 넓은 도로가 아니라 이러한 이야기를 품은 나무임은 명징하다. '실속'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직시하기에 불편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꺾이지 않는 하나의 가치를 미래로 보내고 싶다. 나의 유년 시절 '대장'이 누군가에게도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훼손되지 않고 오롯하게 남아서.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