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 3 - 조선 전기 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 3
김도환 지음, 장선환 그림 / 한겨레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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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군과 매주 1권씩 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를 읽어오고 있는데요.


<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는 초등 한국사 통사책으로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결과들이

시간ㆍ공간적으로 얽힌점이 꼼꼼히 서술되어 있는지라

역사의 흐름을 알아 가는 재미가 있고

또, 이렇게 역사를 이해하면 억지로 외워야 할 사건이 크게 줄어든다고 합니다.



집 근처 산에 올라가 잠깐 같이 읽었네요 ㅎㅎ



초등 한국사 통사책 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3 조선 전기


2권 고려에 이어 3권, 4권 모두 글쓴이 김도환으로 이어지는 만큼

고려에서 조선 건국과정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읽히는데요.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참으로..싸움이 많구나..싶었답니다.


물론 왕권, 신권간 이유있는 대립이고 결과 역사상 좋은 점도, 나쁜점도 있었겠지만

사극으로 제일 많이 만들어진 조선시대이니만큼 사극으로 이해되는 역사적 사실에

조금은 더 원인에 대해 알게 되는 3권이였다..느꼈네요.



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 3권 조선전기는


유교-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두고 이에 따른 통치제도와 사회를 개혁하는 과정과

세종이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유교적 이상국가에 부합하는 표준을 세우는 과정,

임진왜란 전후 조선ㆍ일본ㆍ명ㆍ여진 등 동아시아의 세력 관계 변화도 추적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점이

읽으면서 조금은 어렵지만 타도서와의 차별성을 역시 느낄수 있었던점이였네요.


​한 권을 다 읽고 다시 차례를 펴서 소제목을 읽으니 다시 한번 흐름이 정리되는 느낌이네요.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이 고려 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세웁니다.



 

초등 한국사 통사책 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료에 대해서는

사실에 가깝게 재현한 삽화가 특징인데요.


조선의 건국과정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죽이고 고려 왕족과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조세 제도를 개혁합니다.

신진사대부와 함께 조선을 건국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다는 그림이지요.



한양을 수도로 정학 성곽과 궁궐(경복궁)을 세우고 도로를 정비합니다.

이때 경복궁의 궁궐들은 유교-성리학의 규범에 따르면서도 자연 배경과 어울리게 지었다는 삽화이네요.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는 신진사대부의 역할이 아주 컸는데요.

정도전,남은,배극렴, 조준 등은 개국 공신이 되어 정치를 주도하고 큰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훗날 태종이 되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다른 어느 개국 공신보다도 자신의 공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이방석이 세자가 되자 화가 나게 됩니다.



유교 원리에 따르면 본부인의 맏아들이 세자가 되어야 하고

맏아들에게 문제가 있으면 그 아래 형제들이 차례로 선택되어야 하는데

둘째 부인의 막내아들인 이방석을 세자자리에 앉히자

그 일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정도전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정도전 역시 이방원이 왕위를 노린다고 의심한것이지요.



태조가 왕이 된 지 7년, 세자의 어머니가 죽고 태조도 늙고 병들어 자리에 드러눕자

이방원은 세자와 정도전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잘못된 세자 책봉 문제를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니 이제 세자자리는

당시 첫째 형이 죽고 없었기 때문에 둘째 형인 이방과가 세자가 되어야 했지요.

이방과는 세자가 되었다가 곧바로 왕위에 오릅니다.

조선의 2대 왕 정종이지요.


새 왕조를 세우는 데 자신이 가장 큰 공을 세웠고 왕이 될 자격도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방원은 셋째, 넷째 형과 함께 개국 일등 공신이 됩니다.

마침 정종에게는 왕비에게서 낳은 자식이 없어서 다음번 왕은 이방원이 될 게 분명했지만

넷째 형인 이방간은 셋째 형이 왕위에 욕심이 없으니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움직임은 보잘것 없었고 이방간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충분히 대비한 이방원에 의해

이방간은 귀양 보내지게 됩니다.

이방원은 친형제였기 때문에 죽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2차 왕자의 난이 싱겁게 끝나면서 이방원은 곧바로 세자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역사발자국에서 잠깐 살펴보는 이야기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왕비인 신덕왕후가 죽자 도성안에 무덤을 만들고 정릉이라고 이름지었는데요.

보통 도성 밖에 있어야 할 무덤이지만 신덕왕후(두번째왕비)를 무척 아낀 태조는 무덤을 가까이 두고 싶어했네요.

하지만 왕이된 태종(이방원)은 꼭 신덕왕후를 미워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도성 안에 능이 있는 것이 불편해서 지금의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또한 왕위에 오른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에서는 한명의 부인만 인정되었기에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만 왕비로 인정되고

죽은 후 종묘에 들지 못한 신덕왕후의 묘는 250년이 지난 현종 때 왕비로 인정되고 종묘에도 들어가면서

비로소 정릉도 관리가 되게 되네요.



​인물과 사건에서는 이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이 더욱 자세히 서술되어 있답니다.


유교-성리학에서는 왕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군신공치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기에

정도전이 생각하는 '신하가 실제 권력을 가져야 한다'와 이방원의 새나라 조선의 권력은 왕이 가져야 하고

신하들은 왕을 돕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

조선 왕조 내내 간신으로 평가받은 정도전으로 그려집니다.




유물로 보는 역사도 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가 갖는 특징인데요.


조선시대 왕을 그린 초상화 '어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답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어진은 많지 않지만 태조, 고종, 순종의 어진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하네요.

선원전이라는 건물에 따로 보관한 외에도 조선 왕조의 시조인 태조의 경우

전국 여러 곳에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어진을 따로 보관하며 여러 차례 새로 그려졌다고 합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치적 어려움을 정리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져갑니다.

유교-성리학의 정치원리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이루는 것으로

왕과 신하가 서로 도와 백성을 다스리는 군신공치이지요.

왕권과 신권이 서로 돕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하는 정치 방식으로

왕을 견제하기 위한 의정부와 육조,

왕과 관료들의 지나친 행동을 견제하기 위한 사헌부, 사간원 등의 관청도 새로 만들어지거나 고쳐 만들어집니다.

지방 제도 또한 모든 군과 현에 수령을 보내 다스리고

나라에서 운영하는 학교인 향교를 세웁니다.

고려에 비하면 중앙 정부의 권한이 훨씬 강화된 중앙집권적 정치 구조가 탄생한것이고

조선 사회도 차츰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조선의 통치 제도와 사회 이야기를 다룬 2장입니다.


경복궁의 모습이 삽화로 보여지고 있답니다.


태조 3년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백악산(북악산)아래에 법궁을 세우고

정도전은 왕조와 백성들이 큰 복을 누리기를 바라며 경복궁이라고 이름짓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고종 때 복원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다시 훼손되고

1990년부터 경복궁을 복원해가고 있다고 해요.



조선시대의 신분 제도에 대해 상세히 서술되어 있는 2장에서

태종이 설치한 신문고에 얽힌 이야기로 '경국대전'을 만나볼 수 있고

민인생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시대 왕의 언행과 관리들에 대한 평가와 주요 사건을

후대에 남기는 사관과 사관이 하루하루 기록한 문서인 사초를 읽어볼수 있답니다.

이런 사관들의 노력으로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방대하고 정확한 역사 기록물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네요.



가장 이상적인 왕이라는 뜻의 해동요순​으로 일컬어지는 왕

조선의 네 번째 왕 세종대왕이 이렇게 찬사와 존경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읽을 수 있는 3장

세종과 조선 문화의 발달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태정태세 문단세~ 라고 외던 노랫가락중

네 번째 왕 세종.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는 네 명의 아들과 네 명의 딸을 낳았는데요.

큰 아들 양녕대군은 본래 머리도 좋고 글씨도 잘 썼지만 놀기를 너무 좋아하였다고 해요.

셋째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바꾸면서 본래 세자가 바뀌면 이전의 세자는 먼 곳으로 유배 보내거나 죽이기 마련이지만

태종은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답니다.

태종 자신도 왕이 되는 과정에서 두 이복동생과 많은 신하들을 죽였지만

친형제들만은 끝까지 살렸듯이 ​말이지요.

다행히 충녕 대군은 큰 사달 없이 세자자리에 오르고 ​충녕대군 역시 왕이 된 뒤에도

양녕대군을 형으로 잘 대접했다고 해요.



명나라에서 세자가 된 충녕대군을 불러들이려 하자

태종은 상왕이 되고 충녕대군에게 왕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왕이 된 세자를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없겠지요.

태종은 상왕이 되어서도 군사에 관한 일, 골치 아픈 일은 직접 맡아서 돌보았다고 해요.

궂은 일은 자신이 맡고 아들 세종의 시대는 평화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네요.



세종은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였답니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백성이 근본인 나라, 민본주의가 꽃피우는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세종.

조선시대 모든 왕과 신하들이 민본주의 정치를 내세웠지만

마음을 다해서 행동으로 옮긴 왕은 그리 많지 않은 이유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세종을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왕으로 손꼽는것이랍니다.


 


백성들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실용 분야에도 정성을 쏟은 세종 시대입니다.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역법.

당시 명나라의 역법을 가져다 쓰고 있었던지라 조선의 경도 위도와 다른 명나라의 역법은

잘 맞지 않았던 것이지요.


경복궁에 간의대를 세우고 천문 관측 기구를 설치하여 날마다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는 역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유교-성리학적 이상에 가까운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세종이 있었기에

나라 곳곳에는 성리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선비들이 아주 많아지게 됩니다.

숲속의 나무처럼 많아 '사림'이라고 불리운 이들은

성종 때부터 차츰 관료로 진출하기 시작하고 조선을 왕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유교의 나라로 만들고자 합니다.

공신이거나 후예인 훈구파가 권력을 잡고 있었던 때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생기고 힘이 없던 사림파들은 여러 차례 큰 피해를 입기도 하지만

차츰 성장하여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자리잡아 갑니다.



세종은 왕비인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여덟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 후궁에게서 열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낳아

모두 열여덟명의 아들와 네명의 딸을 두었답니다.

첫째인 세자, 둘째인 수양대군, 셋째인 안평대군 모두 뛰어난 인재였다고 해요.

세종이 죽자 세자인 문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건강이 나빠지면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김종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어린 아들이 바로 단종입니다.



황보인 김종서는 문종의 부탁이 있었다는 이유로 중요한 나랏일을 자기들끼리 처리하기에 이르지요.

왕권이 단숨에 약해지면서 왕족들은 불편해하기 시작작합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죽이고 황보인을 비롯한 관련 인물들도 죽이게 됩니다.
단종을 내쫓고 안평대군을 왕으로 받들려 한다는 이유에서 말이지요.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곧 죽이게 됩니다.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손꼽힐 정도로 글씨를 잘 쓰고 시,그림,음악 등 예술에도 뛰어나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고 그만큼 정치적 영향력도 컸던지라

수양대군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서 그리 했네요.


단종을 상왕으로 올리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 수양대군은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보내고 집현전을 폐지하기에 이르네요.

단종은 또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훗날 숙종 때가 되어서야 다시 왕의 지위를 되찾는 단종이네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탓에 늘 불안해했고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도 믿지 못한 세조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신하들은 그저 왕이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에 이릅니다.

과전법을 고쳐 관료가 벼슬을 그만두면 과전으로 주었던 땅을 되돌려 받고

과전으로 주는 땅도 크게 줄이는 직전법을 시행하게 됩니다.


그 결과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게 되지만 세조의 첫째아들인 의경세자는 세자자리에 오른 뒤

곧 죽어버리고 유교의 예법상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군이 세자가 되어야했지만

너무 어려서 단종처럼 힘없는 왕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둘째 아들 해양대군을 세자로 삼게 됩니다.

세조가 죽은 뒤 세자가 왕위에 올라 예종이 되지만 예종 역시 왕이 된 지 1여년 만에 스무 살 나이로 죽고 맙니다.

세조의 두 아들 모두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이지요.



세자를 정해 놓지 않고 죽은 예종 때문에 다음 왕을 정할 권리는 세조의 왕비이자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에게 있었는데 의경세자의 큰아들 월산군이 아닌 동생 잘산군이 왕으로 삼게 됩니다.

이는 어린 잘산군이 왕이 되면 자신이 왕 뒤에서 직접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것이지요.


잘산군의 장인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한명회였습니다.

세조가 왕이 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사람으로

권력에 대한 욕심이 아주 많았던 한명회는

큰딸은 예종에게, 둘째 딸은 잘산군에게 시집을 보냈답니다.

예종과 잘산군이 삼촌과 조카 사이이니 이상한 결혼이였지만

그만큼 왕실과의 결혼관계를 통하여 권력을 누리고 싶어했던 한명회였네요.



잘산군이 성종이 되고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지위를 왕으로 높이고 덕종이라는 묘호를 올립니다.

또 형인 월산군 역시 월산대군이 됩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정치를 대신하는 수렴청정를 하게됩니다.



훈구파는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힘을 키우기 시작하여 성종이 스무 살이 되어 직접 나라를 다스릴 무렵에는

상당한 세력을 이루게 되는데요. 그런 훈구파로부터 왕권을 지켜내기 위해

세조처럼 신하들을 억누르기보다는 신하들이 서로 견제하게 만든답니다.


궁궐의 책을 보관하던 홍문관에 특별한 역할, 경연에서 왕과 함께 공부하며

왕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할 수 있게 하여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삼사의 역할을 키우게 됩니다.



 

조선 왕조가 안정되면서 사림파가 차츰 관직에 오르게 되고

성종은 그들을 눈여겨 보다가 삼사의 주요 관직에 앉히게 됩니다.

재상 자리를 비롯해 높은 관직을 차지한 훈구파와

삼사를 중심으로 언관 역할을 맡은 사림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왕권과 신권 사이의 균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종이 다스리던 시절은 태평성대였지만 문제의 씨앗이 바로 성종의 집안에서 자라고 있었다지요.

왕비가 셋이나 된 성종의 첫 번째 왕비는 한명회의 딸이였지만

자식을 낳지 못한 채 겨우 열아홉 살에 죽고 맙니다.

후궁이던 윤씨가 왕비가 되지만 질투심이 많았던 윤씨가 성종이 다른 후궁을 좋아하자

화가 나서 성종의 얼굴을 할퀴게 되지요.

왕비를 쫓아내고 곧바로 사약을 내려 죽게 합니다.

폐비 윤씨가 낳은 아들은 왕비였을 때 낳은 아들이였으므로 큰 문제없이 세자가 될 수 있었고

이 세자가 성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연산군이랍니다.

연산군은 성종의 세 번째 왕비를 친어머니라고 생각하며 자라게 되지요.

그리고 셋째 왕비의 아들이 바로 연산군 다음 왕인 진성대군(중종)이 됩니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공부하기를 싫어했고 좋은 왕이 될 생각도 없었을 뿐 아니라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연산군의 횡포로 사림파 관료들이 나서서 잘못을 지적했고 그런 사림파가 귀찮고 싫은 속내를

훈구파가 눈치채고 사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연산군이 사초를 보게 되면서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사림파 관료들을 죽이거나 내쫓게 되는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되고, 더욱 제멋대로 행동하는 연산군을

훈구파는 뒤늦게 말려 보려고 했지만 연산군은 훈구파마저 내쫓고 재산까지 빼앗으려 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연산군에게 아부하여 출세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 가운데 임사홍은 성종 때 정치를 어지럽게 할 사람이라고 평가되어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인물로

그 원한을 풀기 위해 연산군에세 어머니 윤씨가 쫓겨나 사약을 먹고 죽은 일을 알리게 됩니다.


무오사화때보다 더 많은 관료들이 죽거나 쫓겨나게 이르지요.

이 사건이 갑자사화입니다.



두 차례의 사화에서 살아남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손을 잡고 반란을 계획하게 되지요.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받들게 되고 이가 바로 중종입니다.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올린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신하들의 힘으로 왕이 된 중종은 힘이 없고 권력을 쥔 공신들은 중종에게 왕비를 내쫓을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반정을 일으킬 때 자신들이 죽인 사람들 중 한명이 중종의 장인이였기에

후에 보복이 두려워 쫓아내도록 하고 새로 들인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마저 아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됩니다.

세 번째 왕비를 맞아들이는 그 때 등장하는 인물이 조광조입니다.



두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힘 있는 세력을 만들어야 왕의 잘못된 행동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고

이 때 등장한 사림파의 중심인물이 조광조랍니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려 했던 조광조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된 지 겨우 4년만에

기묘사화를 겪게 되면서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 사림파의 후예들은 조광조의 꿈을 이어받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조광조를 등용할 즈음 중종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를 맞이하게 되고 7년 만에 아들을 낳게 되는데요.

이때는 이미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낳은 아들이 세자(인종)자리에 있었답니다.

중종이 죽으면서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조광조의 억울한 죽음도 풀어주고 사림파를 다시 등용하려 했지만

왕이 된 지 9개월도 안되어 죽고 맙니다.

인종은 아들이 없었기에 문정왕후의 아들 곧 명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고

겨우 나이가 열두 살이였던지라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됩니다.


사림파, 훈구파 세력이 약해져 있었던 명종때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이 권력을 쥐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외척이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권력을 쥐는 일이 많아지게 됩니다.



문정왕후가 죽자 외척 윤원형도 순식간에 힘을 잃고 다시 사림파가 중앙 정치에 등장하게 됩니다.






명종이 아들 한 명을 낳았지만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고 이 후 명종은 세자를 정하지도 않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소홀히 하다가 죽고 맙니다.


 명종의 조카들 가운데 명종의 양아들이 되어 왕위를 이어가는것이 관례였고

명종의 왕비(인순왕후)에게 누구를 고를 것인가 하는 권리가 있었는데요.

명종이 살아 있을 때 가장 사랑했다는 이유로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선택합니다.

조선 왕조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비가 낳은 아들이 아니면서 왕이 된 선조가 됩니다.

왕이 되어야 할 뚜렷한 이유도 없었고, 힘 있는 외척도 없었던 선조인지라 왕권이 약할 수 밖에 없었고

사림파의 뜻에 따라 을사사화 때 쫓겨난 사림파에게 관직을 주기 시작하면서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활동한 젊은 사림파 가운데 퇴계 이황의 제가가 많았답니다.

율곡 이이가 사림파의 큰 학자로 이름나게 되지요.

제자를 길러 내고 책을 펴내고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아주 조금씩 조선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사림파는

이황과 이이 이후로 조선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지만

사림파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기 시작하면서 선배 세력과 후배 세력,

선배들이 대부분 한양 서쪽에 살아서 서인, 후배들은 주로 한양 동쪽에 살아서 동인으로 불리우고

서인과 동인의 다툼이 시작됩니다.


선조는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다툼을 더 부추겼다고 해요.

두 세력이 다투고 결국 왕이 마지막에 결정권을 쥐게 되면서 왕권이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해요.



동인과 서인이 다투는 과정에서 동인 세력이 커지고 권력을 갖게 되자

동인 안에서 다시 다툼이 생기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됩니다.

북인은 주로 조식의 제자들이고 남인은 이황의 제자들이였다고 해요.




세종 때의 이야기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과 일본이 한동안 평화를 이어 갔지만

일본이 무로마치 막부의 후계자 문제를 두고 큰 전쟁이 벌어지면서 일본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더 강력하고 성능 좋은 무기가 필요한데

네덜란드 상인들이 와서 사고파는 물품가운데 새로운 무기인 조총이 등장하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백여년 간 이어진 전쟁시대를 막을 내리고 일본을 통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 명나라와 전쟁을 치르기로 결심하게 되는데요.

대마도 영주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됩니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대바도가 큰 괴로움을 겪게 되기 때문에

조선에게는 일본의 형편을 알리고, 일본에게는 조선의 지도를 바치게 되지요.


일본에서 보내온 서신은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을 거쳐 갈 테니

길을 막지 마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는데요.

형식상 조선의 협조를 요청한 문서였지만 조선이 길을 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알고 있었고

사실상 조선에게 전쟁을 하겠다고 알린 것이나 다름 없었답니다.

놀란 선조는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게 됩니다.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지 않을까 의심하던 참인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의 움직임을 알려오자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게 도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조선 조정은 부랴부랴 경상도와 전라도 남쪽 지역의 성벽을 고쳐 쌓게 합니다.

섬나라인 일본은 수군이 강하고 육군이 약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기들끼리 백여 년을 전쟁을 치른 일본군은 육군이 강하고 오히려 수군이 약한 편이였답니다.

1592년 선조 25년때 7년 동안이나 이어진 임진왜란이 시작됩니다.


연이은 패전 소식에 선조는 몸이 약한 큰아들 임해군 대신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삼고

평양을 향해 피난길을 떠나게 됩니다.

조정 관료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한 무리는 자신과 함께 평안도 의주로, 나머지 한 무리는

세자와 함께 함경도로 가서 백성들을 모으게 합니다.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위태로운 조선의 선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명나라의 군대 역시 일본군에서 형편없이 패하고 요동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하지만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왔다는 소식은 조선군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게 되고

무슨 일인지 갑자기 일본군이 주춤거리기 시작합니다.



전라도 지역 조선군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전열을 가다듬고 죽기를 각오하고 일본군과 맞서게 됩니다.

큰 승리는 아니지만 일본군을 괴롭히기에는 충분했던데다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도 눈부셨답니다.

당시 일본군이 이미 점령한 곳에 최소한의 부대만 남겨 놓고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으나

홍의장군 곽재우, 김천일, 고경명, 조헌, 김덕령 등 의병장등의 활약으로

남은 일본군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보게 되지요.



무엇보다 일본군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은 바로 이순신의 등장이였답니다.

일본군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한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비롯하여 조그만 전투용 배를 많이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답니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분선 두 척이 놀랍게도 임진왜란 사흘 전에 완성되었다고 해요.



일본이 최대한 빠르게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 도성을 점령하고 왕을 사로잡으려는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군대가 빠르게 이동해야 하고,

따라서 식량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가져갈 수밖에 없었지요.

나머지 식량은 바로 배를 이용해 남해와 서해를 거쳐 식량을 실어 나를 작정이였지만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승리는 일본군의 이런 계획을 무너뜨리게 된것이죠.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을 통해 조선은 전라도 지역을 안전하게 지켜 낼 수 있게 되었고

한편 명나라에서는 조승훈의 군대가 일본군에게 졌다는 소식이 크게 놀라며

이여송에게 4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가서 싸우게 합니다.

평양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물러난 일본은 한강 뱃길을 손에 넣으려 합니다.

즉 행주산성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한강 뱃길의 주인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군대를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향합니다.



쉼 없이 조총을 쏘며 달려드는 일본군에게 조선군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화약 무기, 화살, 돌 따위를 무기 삼아

반격하고 오래 전투 끝에 일본군은 산더미 같은 주검을 남기고 물러나게 됩니다.


한산도 대첩, 진주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손꼽히는 행주대첩의 이야기였습니다.


이후 전쟁은 5년 동안 멈춰 있었으나 무너진 조정을 세우고 백성들을 보살피고 다시 있을지 모를 전쟁을 대비해야 했던

조선은 전쟁이 누구 책임이냐를 놓고 다시 나뉘어서 싸우고

중심을 잡아야 할 선조는 변덕이 죽끓듯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신하는 쫓아내곤 했다네요.

너무도 헛되이 보낸 시간으로 기록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다시 일본군 13만여 명을 보내 조선을 공격해 옵니다.

정유재란의 시작입니다.

임진왜란의 패배 이유가 이순신과 조선 수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수군을 한층 강화한 일본은

간첩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게 해서 이순신과 조정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때마침 조선 수군 지휘권을 놓고 이순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원균 역시 상소를 올리게 되네요.

선조는 이순신을 모질게 고문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했지만

영의정 유성룡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적극 나서서 말린 덕에 이순신은 목숨만은 겨우 건질 수 있었고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게 됩니다.


정유재란이 시작되면서 선조는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에게 일본군을 공겨하게 했지만

크게 패하고 말자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됩니다.


남해가 끝나고 서해가 시작되는 길목으로 일본 수군이 육군과 보조를 맞추어 서해로 올라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바닷길인 진도 앞바다로 나아갑니다.

물살이 거칠기로 유명한 곳으로 바닷물이 으르렁으르렁 울면서 흐른다 하여

이름도 울돌목(명량)이였다고 합니다.

일본군 배들이 제멋대로인 물살에 휩쓸려 서로 부딪히는 틈을 이용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 속으로 뛰어들어 싸움을 벌이고 용감하게 싸워 일본 수군의 배를 서른한 척이나 가라앉히는 대승을 거둡니다.


바닷길이 막히자 육지의 일본군도 더 이상 북쪽으로 올라갈 수 없었고

이 때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이 다시 크게 활약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던 일본군은 경상도 노량에서

몰래 배에 올라 일본으로 돌아가려 한 사실을 안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하지만 일본군이 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7년의 큰 전쟁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나라 이렇게 동아시아의 세 나라가 얽혀 싸운 대규모 전쟁이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르던 세력은 힘을 잃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롭게 권력을 잡는

에도 막부 시대가 시작되게 됩니다.

명나라가 전쟁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이 요동 북동쪽 지역에 살던 여진족이 힘을 키워

누루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우고 나라이름을 '청'으로 바꿔

만리장성을 넘어가 명나라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7년 전쟁 동안 많은 것이 파괴되기에 이르렀고

얼마 후 조선은 다시 청나라와 전쟁을 치뤄야 했으며 사회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요.



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4 조선 후기를 바로 읽어야겠습니다. ^^


준군은 3권을 읽으면서 제일 기억에 남았던 이순신 장군의 대 활약을 생각하며

거북선을 그려보았답니다.


거북선은 판옥선 위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하게 덮개를 얹고

거기에 칼과 송곳을 꽂아 적군이 올라탈 수 없게 만든 전투용 배랍니다.

임진왜란 때 3~5척 정도 만들어진 거북선은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졌고

고종 때인 1867년까지도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있네요.



 


이순신 장군 동상의 모습도 살포시 밑에 그려놓았네요 ㅎㅎ



초등 한국사 통사책 천천히 제대로 읽는 한국사. 정말 제대로 읽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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