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은 '겨울'이라는 계절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기어코 장맛비같은 폭우가 쏟아졌다.

 "원~무슨 비가 이리 쏟아지는거야?"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큰 우산을 챙겨들고 나설채비를 했다. 현관문 앞에 서서 신발을 신으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힐끗 보자 픽 웃음이 났다.

"늙었구만. 팔뚝에 살도 두툼하니 붙고."

 

빗 속을 헤치며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선술집에는 미리 도착한 친구들이 바알간 조명이 드리워진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손길로 나를 반겼다. 스무살에 만나 이제 마흔. 나를 비롯해 다들 제 나이에 걸맞는 모습들로 변해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어느덧 스무살인 어떤 날로 되돌아가 있곤 한다.

 

 

마스다 미리의 <전진하는 날도 하지 않는 날도>는 그녀가 삼십대 후반부터 마흔을 맞이하는 시기에 썼던 에세이들이다. 대학졸업을 앞두고 어른이 되는 것이 무서워서 울기만 했던 그녀가 마흔이 되어서는 괜찮아졌을까?

 

전문대를 졸업한 뒤, 나는 무섭고 무서워서 울기만 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른의 세계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중략)

그리고 밤이 되면 이불 속에서 "무서워, 무서워"하고 정말로 매일 울었다. p.82

 

 마흔이 되었다. 정말로, 완전히, 어른의 영역에 발을 들이민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나는 나를 내 생각대로 할 수 없다. 사춘기 시절과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 p.132

 

 나 역시 마흔을 맞이하며 올 한해 때아닌 사춘기를 겪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짜증, 허무함, 슬픔 등의 감정이 폭우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면 속수무책으로 흠뻑 젖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내고 이 책을 다시 꺼냈다.

치통을 견디다 못 해 의사 앞에서 울어버리기도 하고, 오랜 친구와 마흔살 기념 여행에서 첨벙첨벙 물놀이를 하며 좋아하는 음식 순위를 매기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아직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내 인생에게 "괜찮아"라고 위로를 건네는 것 같다.

 

빗길을 뚫고 와서 만난 친구들과 헤어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따다닥, 따다닥'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전진하는 날도 하지않는 날도 편안하게 받아들이자. 마흔이라고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닌데 미리 울 게 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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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흉측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

그는 부모님과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훌륭한 가장이자 유능한 영업사원에서 하루아침에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자신의 변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 그는 늦잠을 잔 자신을 책망하며 틀어진 그날의 일과를 수습할 대안을 열심히 생각해 내는 한편,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에 놀랄 가족들을 염려하며 모습을 숨긴다.

 

그러나, 그의 결근을 추궁하러 온 회사의 지배인과 가족들 앞에 결국 충격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놀라 쓰러지는 어머니와, 허둥지둥 도망 가는 지배인, 그리고 마치 벌레를 구석으로 몰 듯 쿵쿵 발을 구르며 지팡이를 휘두르는 아버지로부터 몸을 피해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 온 그는 그날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시작한다. 가족 중 단 한 명. 그의 여동생만이 방에 들어와 그의 식사를 챙기고 안부를 확인하곤 하였다.

 

 바로 어제. 나는 갑작스럽게 일을 쉬게 되었다. 1년간의 근로계약 종료를 앞두고 재계약에서 밀려난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남은 연차를 소진해야하므로 당장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지 말라는 담당자의 말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가르치는 복지교사인지라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생이별을 하게 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한편으로 밀려드는 불안감. 현대 사회에서 어느 날 갑자기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사회 혹은 가정의 구성원으로서의 효용성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뜻밖에 맞이한 휴일 날, 나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잠자의 변신은 현대인의 삶에 비추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숨쉴틈 없이 빡빡하게 자신의 삶을 억누르는 현실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현실 그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이라고 하기에 그의 변신은 너무 외롭고 초라하다. 다정하게 그의 식사를 챙기던 여동생 그레테 마저도 차차 무신경해졌으며, 가족들은 오히려 그가 없는 생활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갔다.

 

여동생은 무엇을 주면 그레고르가 특히 기뻐할지 이젠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과 점심때 가게로 달려가기 전에 황급히 아무 음식이나 되는대로 그레고르의 방에 발로 툭 밀어넣었다가 저녁때면 그냥 비로 한번 휙 쓸어냈다. 그가 음식을 맛이라도 보았는지 아예 손도 안 댔는지-손도 안 댈 대가 허다했다-는 신경도쓰지 않았다. -p.95

 

마흔 살. 뒤늦은 나이에 글을 써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시작한 나에게 실직은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다. 아껴가며 생활하면 가계에 크게 지장이 없을 듯도 하다. 하지만, 잠자와 같이 이제 쓸모가 없어진 내가 주위로부터 잊혀지게 되지는 않을까? 성가신 존재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한 나 자신이 왠지 측은하게 느껴진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스스로 수치로, 효용성으로 평가받으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며 때론 생산성으로 따질 수 없는 '바보 같은 짓'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고 가치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다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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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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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일상에 천천하 스며드느듯 정겨운 느낌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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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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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깔깔마녀는 일기 마법사
황미용.신재현 지음 / 부표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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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일기쓰기 힘들어하는 초등학교2학년 우리 딸을 위해서 샀습니다.  

형식별로 내용이 잘 정리 되어 있어 보기가 편하고 실제 아이가 쓴 일기를 글씨와 그림 그대로 실어 놓아 저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가 참 재미있게 읽었더랬습니다. 

일기쓸거리가 생각 나지 않으면 맘에드는 형식을 골라 읽어보고 따라 써보기도 하고 그렇게 하고 나면 스스로 만족해 하더라구요. 

일기쓸때 엄마가 옆에서 코치를 하면 내용정리는 잘 되지만 아이 특유의 창의성이 사라져버립니다. 이 책을 엄마가 손 대지 않고 아이의 자유스러운 생각을 자연스럽게 유도해내기 매우 좋은 책인듯 합니다. 

제가 공부방 논술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수업시간에 교재로 종종 활용했습니다. 

지금도 일기 쓰기 힘들어하는 아이의 엄마께는 잊지않고 꼭 권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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