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 - 더 나은 미래로 향하는 기술비평
이영준.임태훈.홍성욱 지음 / 반비 / 2017년 1월
평점 :
400여년전 근대의 초입에서 데카트르는 지식은 확실성과 명증성을 갖춘 근거가 있어야 하며, 이를 가증하게 해주는 확고한 토대는 오직 철학이나 수사학 신학 등이 아닌 수학뿐임을 역설한다. “명석 판명하게 인식되기 전에는 무엇이든지 결코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라는 주장을 제 1법칙으로 삼은 그의 회의주의적 태도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합리성으로 연결되어 근대사회의 토대를 만들었다. 오늘날 과학적(scientific)이라는 표현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의 권위와 신뢰를 상징하는 단어는 없다. 다만, 보이지 않는 힘들에 대한 의존에서 해방되어 과학과 합리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자연을 지배하는 근대적 인간의 모습은 그리 유래가 오래지는 않다. 근대가 시작되기 이전 고대와 중세의 사람들은 ‘경전’ 또는 ‘ 신의 말씀’에 삶의 방향을 의존하였다. 이제 그 특별한 자리는 ‘과학’과 ‘수학적 해석’이 대신한다. 대다수 근대 학문의 방법론은 수리적 도구에 기반한 양적 분석(Quantitative Analysis)이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에서 파생된 과학적 결론과 기술적 성과는 그대로 사회 전체의 방향성 결정에 연결된다.
이 지점에서 질문을 한번 던져본다. 근대인은 이제 과거 인류를 휘감고 있던 불확실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근대 사상가들이 지향했던 자유롭고 독립적인 의사결정자(decision maker)가 되었는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스스로 알고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과연 실재를 반영하는가? 논쟁의 여지없이, 근대과학과 과학기술은 분명 인류가 존재한 이래 세계와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가장 확실한 지식을 제공하는 방법론이다. 그렇지만 사회학자 Richard Sennett이 지적했던 것처럼 독재(tyranny)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용례는 주권(soverignty)이며 모든 문제가 공통의 주권적 원리에 회부될 때 그 원리는 사회에서 독재자로 군림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권자 다수의 동의에 의한 정부(gorvernment by consent)가 주된 구성원리인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적 의사결정과 과학적 전문성 사이의 긴장을 해결해나가는 문제는 이런 측면에서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시민(people)’은 과학과 함께 근대를 이루는 핵심가치들 중 하나이다. 인류에게 과학이 파고들며 남긴 흔적만큼이나 근대의 시민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바뀐 삶의 모습이 크다. 시민은 인간이 가진 지적 역량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며, 이 과정에서 이사야 벌린이 규정했던 ‘무엇을 할 자유(freedom to, Positive liberty)'를 유지해나간다. 그러나 과학이 인간의 삶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등장한 도구임에도, 전문화된 과학기술과 그 의사결정구조가 시민의 자율성을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하고 있다. 주권을 계약에 의하여 양도한 시민은 그 정치체제가 잘 작동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유와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이와 동일하게 과학기술에 대해 잘 모르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의심없는 믿음을 갖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과학기술이 시민사회 및 민주주의 체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될 수 밖에 없는 현대사회에서 결국 우리는 스스로의 삶에 과학기술 지식이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지식생산에 기여하는 주체로 기능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인 셈이다. 이런 지점에서 최근에 출간된 과학기술 비평서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는 그 제목에서부터 시민이 과학기술사회의 주권자로 자리하기 위한 지적 긴장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또한, 저자들은 책의 서문부터 현대 과학기술이 행인의 손발을 침대에 묶고 그에 맞추어 잘라버리는 ‘프로크루스테스 철 침대’ 의 성격이 있다는 인상적인 비유를 들어 책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한다.
책은 크게 디지털 비평, 기계 비평, 적정기술 소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별적으로는 사물인터넷, 디지털 헬스케어, 빅데이터의 각종 차세대 기술에서 우리주위의 현실적 기술 및 저개발 국가에 제공되는 발명품의 성과 등을 소재로 다룬다. 임태훈이 집필한 디지털 비평 부분은 디지털과 신자유주의라는 두 별도의 개념을 연결지어 이를 노동소외와 관련지음으로써 책의 첫장부터 묵직한 주제의식을 선보인다. 특히,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는 미래담론의 주제인 4차 산업혁명과 직접 연결되는 인더스트리 4.0이 내재하는 문제점에 대한 분석이 이채롭다. 사실 국내에서 인더스트리 4.0은 ICT와 제조의 결합을 통한 경쟁력 강화를 핵심 개념으로 한다는 정도가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기계와 사람 및 인터넷이 하나로 뭉친 생산 시스템의 완전한 전환을 통하여 센서, 모바일 스마트공장과 디지털공장의 혁신을 도모하는 과정은 생산 패러다임의 전환을 약속한다. 전자를 통해서는 정확하고 효율적인 제품의 기획과 개발 및 설계가, 후자를 통해서는 설비의 철저한 점검과 원활한 공정이 가능해지므로 생산과정상의 극도의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4차 산업혁명은 그 자체로 사회 전체에 빛나는 미래를 약속하는 기술담론일 뿐, 이 변화가 내포하는 강화된 신자유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별다른 논의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인더스트리 4.0에 의한 패러다임의 변화 과정을 희망찬 내일을 위하여 잠시 견뎌내야할 과도기라고 설명하는 일군의 학자들에 대한, ‘노동의 현재’에 귀기울이라는 임태훈의 반박은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는 J.M.Kaynes의 일갈만큼이나 생각의 여지를 던져준다. 저자와 독자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홍콩의 한 투자금융회사가 이미 2014년에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임원으로 선임하여 투자와 관련한 의사결정 일체를 맡겼다는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극점에 도달한다. 과학기술은 인간이 직접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돕는 도구가 아니었던가? 이에 대하여 임태훈은 첫장 전반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요약하여 답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 시스템을 기업과 정부가 알아서 운영해주길 바란다. 성직자 도움 없이는 성경을 읽지 못했던 중세의 문맹자들이 꼭 이런 신세였다.”
임태훈이 직설적 문체를 사용하여 충격요법에 가까운 문제제기를 시도하였다면, 기계비평을 맡은 이영준은 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풍경화를 그리듯 기술해나간다. 이영준이 다루는 소재는 야구장, 수도 정수장, 지하철역, 서울역 주변의 빌딩 등과 같은 현재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요소들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기계들이다. 1장의 문체가 분석적이었다면, 2장의 문체는 다분히 묘사적이다. 또한, 임태훈의 문장에서 날선 비판이 번뜩이는 반면 이영준은 부드러운 문장들 사이에 우리가 평소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사물의 이면적 특성들을 슬그머니 드러내는 전략을 취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읽기라는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목적을 놓고 볼 때, 취향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두 글쓰기 방식의 효과에 우열은 없는 듯 하다. 이는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의 약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예술의 본령이 흔히 우리를 묶고있는 속박에서 벗어나 세상을 다르고 새롭게 보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특성을 감안한다면 이영준의 방식은 일종의 문학적 서사에 기반한 기술비평으로 보아도 될 터이다. 첫장의 무게에 눌린 독자라면 이 장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잠시의 정신적 여유를 갖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 과학기술로 둘러쌓인 세계에 근대인들이 함입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것이니 독서의 허리를 담당하는 챕터의 내용으로써 설득력 있는 기획이라고 하겠다.
이어서 책의 마지막 장은 홍성욱이 집필한 적정기술에 대한 설명으로 접어든다. 홍성욱은 과학기술 비평이나 과학철학 등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독자라면 누구나 알만한 중량급 학자이며 이미 국내에서 과학기술사회학(STS)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일종의 모범답안으로 제시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사회의 문화와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만들어진 기술로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 개념이다. 본래 적정기술은 1960년대 경제학자인 E.F.Schumacher가 제 3세계의 발전에 초점을 두어 제안한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 개념에 기원하며, 이후 이 단어가 갖는 이미지 열화적 뉘앙스 때문에 중간기술이라는 용어로 교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성욱은 기존의 용어 및 대안적 개념들을 모두 적정기술에 포섭되는 것으로 묶은 다음 세가지 줄기를 제시한다. 저자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면 적정기술의 첫 번째 줄기는 그 본래적 의미였던 빈곤탈출과 주민의 삶 개선을 위한 중간기술이며, 두 번째 줄기는 중간기술과 달리 선진국을 대상으로 하여 자본과 에너지를 과소비하는 기술을 대체하기 위한 대안기술(alternative technology), 세 번째 줄기는 선진국 내 소외계층 등을 위한 사회적 기술(social technology)로 정의한다. 각각의 정의에 따른 목표사례로는 식수확보, 태양열 에너지,저가의 의료진단기술 등 그 자체로는 별달리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현장에서 실무를 직접 담당하는 과학기술자로써 본인만의 경험을 직접 쏟아내는 블루스토브(바이오연료를 사용하는 에너지 부족지역의 조리기구) 케이스나 아프리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를 이용한 천연 생리대 보급 케이스는 적정기술이라는 개념이 과연 문제의 해결책인지 의문을 품었던 독자의 직관적 이해를 돕는다.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홍성욱의 실무경험은 적정기술의 세 조건으로써 제시된 적합성, 실현 가능성, 지속성 각각의 덕목에 부합하는 실질적 방향을 상세하게 제시하여, 이 책의 결론부분에 추상적인 개념들이 다수 동원되었음에도 그것이 공허한 논의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 저력을 보여준다. 즉각적 해결책이 아닌 장기적 노력이 들어가는 방안들이 현재 과학기술의 문제 해결에 있어 최선의 대안임을 최전방의 전문가 입장에서 세심하게 설명하는 방법으로, 시민 각자가 스스로의 삶에 과학기술이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도록 이끄는 점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소득이다. 이렇게 보면 당초 이처럼 무거운 주제를 갖는 책의 결론을 집필할만한 역량을 가진 저자일 것이라는 기대가 헛되지 않은 셈이다.
저명한 과학기술 사상가인 Kevin kelly는 과학기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서 기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이 책은 이러한 기준에 충실하게 대응하는 문법을 갖추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책 전반의 인상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점은 이 책 내용 구성의 일관성에 있다. 3명의 저자가 각기 다른 주제로 개별집필을 했음에도, 실제 독서를 해나가면서 ‘거대담론에 기반한 문제제기 - 일반적 사례제시 - 이상적 대안 제시’라는 논리적 흐름이 물흐르듯 이어지는 것을 확인한 점은 한권의 책을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인상적인 경험이다. J.Bronowski는 민주적 방법과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 과학의 믿음이라고 말하였다. 시민이 과학을 이해하지 못할 때 과학기술은 인간을 배반하는 무서운 도구로 다가온다. 17세기의 시민은 ‘사회계약’을 이해하기 위한 정치철학에 대한 앎이 필요했고, 21세기의 시민은 데카르트가 꿈꿨던 자유로운 주권자로 바로 서기 위하여 과학기술에 대한 앎이 필요하다.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는 그러한 노력의 마중물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