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마법사 - 논술 실력을 키워 주는 초등명작 16
라이먼 프랭크봄 지음, 함윤미 옮김 / 깊은책속옹달샘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에메랄드 성으로 가는 우리
책내용 책상태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는 하나같이 자유, 평등, 박애의 논리를 내세운다. 그 외관은 아름답고 인격적이며,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현실의 모든 계층은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들이다. 마치 어느 돈 많은 친구가 학비 문제로 고민하는 다른 친구에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그러한 충고를 들은 그 가난한 친구는 화는 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 한마디에 위안을 얻고 자신의 위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사는 게 다 그런 건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는 대중에게 끊임없이 '사는 게 다 그런 거야'라고 속삭인다. 불평등한 현실 조건을 평등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그 말은 잔혹한 억압의 역사를 아름답고 정의로운 역사로 위장하는 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위장된 자명성은 허위의식에 뿌리를 둔 '신화'이며 그것은 행복과 평등이라는 허구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행복신화, 평등신화이다.필자는 오즈의 마법사라는 동화가 이러한 행복신화를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노란 벽돌길을 따라 걷는 도로시 일행.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 노란 벽돌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는가. 심장을 얻고자, 뛰어난 두뇌를 얻고자, 용기를 얻고자... 결과적으로 그들 중 누가 소원을 이루었는가. 그들은 소원을 이룬 양 기뻐하지만 사실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즈의 마법사가 그들에게 준 것은 소원을 이루었다는 '착각'일 뿐이다. 가짜 심장, 가짜 학위, 가짜 용기.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오즈의 마법사는 현대판 정치인을 상징하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마저 준다.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환상을 품고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오로지 노란 벽돌길만을 따라가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려 보면 무언가 섬찟한 느낌마저 든다. 물질문명으로 흐릿해진 의식 구조, 그로 인해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지배층이 잘 닦아놓은 노란 벽돌길을 따라 걷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 길만 잘 따라가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슬프고 허황된 희망을 품고 있지 않은가.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모두 힘들게 살고 있는데 불평하지 말자,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할 수 있겠지... 등등. 과연 이러한 의식들이 우리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식구조 안에서 우러나온 관념일까?
예를 들어 백화점에 쇼핑간 주부를 떠올려 보자. 그녀는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백화점 감시 카메라 장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녀가 딛고 있는 걸음걸음은 모두가 백화점 측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걸음걸음이다. 백화점 1층에 화장실이 없는 이유는 2층 화장실에 갔다가 2층 물건도 사고 나오라는, 즉 물건을 사지 않는 손님은 필요 없다는 백화점 측의 의식이 반영된 결과이며 소비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먼저 어느 쪽을 향해 갈 것인지 조차 치밀하게 계산, 그 방향에는 좀 더 고급스러운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백화점 직원의 부드러운 미소를 뒤로 한 채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나오면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하아...." 시장통을 빠져 나오면서 그렇게 까지 의미심장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일은 극히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통에는 우리의 발걸음을 억압하는 어떠한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지저분하지만 물질 문명에 덜 오염된 지역이기에 시장은 백화점보다 더욱 아름답고 향기로운 공간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더욱 편리한 공간이다. 길을 가다가 배가 고플 만 하면 그 곳에 떡볶이 집이 있고 마늘 사오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뇌리를 스칠 때쯤이면 저 쪽에 야채 가게가 보인다. 공책 사오라던 동생의 부탁이 떠올라 아차 싶을 때 그의 눈앞에는 문방구의 입구가 펼쳐져 있다. 마늘 사러 지하 매장에 갔다가 공책 사러 6층 매장에 가야하는 백화점의 불편함에 비하면 대단한 편리함이 아닐 수 없다. 백화점의 구조는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이용자들에 대한 일방적 폭력의 구조이다. 그 폭력을 우리는 문명 내지는 문화라고 부르며 이 문화는 폭력을 순화한다는 점에서 억압이다. 노란 벽돌길을 따라 걷는 도로시 일행은 아름다운 요정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요정님은 도로시에게 온갖 고생을 다 시켜 놓고선 나중에 가서야 요건 몰랐지, 하며 빨간 구두 뒷꿈치를 세 번 탁탁탁 치라고 가르쳐 준다. 아주 얄밉기가 이를 데 없는데 도로시는 '고마워요. 요정님' 하며 어쩔 줄 몰라한다. 선심 쓰는 듯한 요정님의 태도는 시장통에 인사 나오신 정치인을 연상시킨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안내하는 길의 최후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에메랄드 성이다. 에메랄드 성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조장하는 미의식을 상징한다. 초록색 알의 안경을 쓴 채 회색 건물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에메랄드 성'이라고 말하는 그 성의 주인들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뉴욕의 번화가에나 있을 법한 고층 빌딩이 세워졌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그 날, '63빌딩이 문을 열던 날'에 우리는 그것이 부드러운 곡선의 미를 살린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며 입이 닳도록 칭찬했었다. 물질문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증명이라도 해보이는 듯했던 63빌딩의 높이는 사실상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를 매혹시켰던 63빌딩의 높이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아름답게 포장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고 난 뒤 아돌프 아이히만은 렘베르크 철도역의 조화로운 건축물을 보고 나서야 자책 어린 구토증을 멈출 수 있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그 아름다운 건축물은 살인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종의 치료약에 다름 아니었다는 사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이면에는 잔인한 피의 역사가 개입하고 있으며 지배층이 교묘한 방식으로 그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 역사는 감추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미의 기능은 끔찍한 죄악을 은폐하고 치유하면서 현실의 모순과 오물을 정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야만과 문명의 경계점에 자리하고 있는 미의 기준이라는 것들은 사실상 거짓에 불과한 것이다. 에메랄드 성이 허구이고 오즈의 마법사가 마법사가 아니었듯이. 오즈의 마법사를 신성시하는 의식 역시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와 닮아있다. 지금처럼 먹을 것이 풍부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오히려 지천이 모두 먹을 것이었다. 개구리, 참새, 미꾸라지 같은 것들은 너무나 흔하게 보이는 먹을 것이어서 먹을 것이라고 굳이 이름 붙이지 않은 것들일 뿐이다. 그 시절에 봉지에 든 과자라든가 아이스크림은 흔하지 않기에 '부족한 먹을 것'의 하나로서 그 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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