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 광해군일기 - 경험의 함정에 빠진 군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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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세자 책봉부터 시작해서 왕이 될때까지..아니 왕이 된 후에도 불안한 지위 속에 있었다. 

가장 큰 책임자는 그의 아버지 선조라고 하겠다.  계속 세자책봉을 미루던 선조가 임진왜란이 터지자, 부랴부랴 그를 세자로 세워, 자신은 도망가고 광해군에게 분조(나누어진 정부?)를 이끌 것을 명한다. 평화로운 시기의 세자라면 참 팔자 좋아졌구나하겠지만, 전쟁 중 세자로 책봉된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전쟁터로 뛰어들어갔으니, 잘못하면 그냥 개죽음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쟁 기간 중 광해군은 아버지가 해야할 일들을 대신 처리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했었던가? 생각보다 일 처리를 잘하고 오히려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니 질투심에 눈이 먼 못난 애비 선조는 광해군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기간 중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에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고, 설상가상으로 정실 소생의 영창대군이 태어나 그의 세자로서의 지위는 위태롭게 된다. 세자를 지지하고 그 주위를 튼실히 해줘야할 임금이 저 모양이니 신하들 또한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멀어지고 여러 해 동안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으며 불안한 상태에서 세자 시절을 보내야했던 광해군.

광해군이 왕이 된 후 역모 사건에 과민 반응을 하는 것은 그 동안의 경험 때문에 생긴 일종의 컴플랙스라고 할까? 

사실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죽인 것은 물론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것 하나만 두고 패악한 임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왕권강화를 위해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는 일은 많이 일어났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태종 이방원을 보면 알지 않는가?  광해군의 과민반응이 신하들에게 역이용 당해 수많은 옥사로 발전을 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중립외교라는 것이 생각보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명분만 따져대던 사대부들에게는 굉장히 문제있는 사고방식이었다. 사대부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미신으로 인한 무리한 토목공사 등으로 백성들의 지지도 못 받은 광해군은 잿더미 속에 홀로 고립된 형상이었다. 

정치는 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건 다름 아닌 지지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꼽더라도 사대부의 지지를 잃지 말았어야했으며, 아니면 백성들로부터의 지지를 얻었어야했었는데, 두 개다 실패했으니깐 말이다.  

광해군 다음 임금이 인조라는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이렇게 아까운 임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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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행정법 총론 - 전2권 - 국가직.지방직 시험대비, 2010 대비
김용철 엮음 / LEC에듀넷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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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가 보기엔 세세하게 잘 구성되어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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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 선조실록 - 조선엔 이순신이 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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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조선시대 역사 중 읽고 싶지 않은 부분이라고 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기 그리고 일제치하 정도 되겠다. 단순히 전쟁에 휘말려서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된 과정. 일어난 후의 태도들이 무능의 극치라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 터지기 직전까진 선조가 잘난 임금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능한 임금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냥 그저그런 보통 수준 정도의 임금. 아니, 순간적인 기지로 후계자로 지목이 된 걸 보면 오히려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조선은 개국 이래 소소한 내전은 있었어도 큰 외침이 없었던 것과 학문하는 선비만 높히 여겨 상대적으로 무신들이 힘을 잃게 되다보니 국방력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곪고 있던 것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크게 터졌던 것이다.

풍신수길을 직접 보러 통신사도 보내놓고서는 당파싸움 때문에 의견이 갈라져 치고박고 하느라 전쟁 대비할 생각도 못한 대신들.  수도 한양까지 후다닥 함락이 되어버리니 명나라에선 일본과 조선이 한 편이 되서 짜고 치는 줄 알았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전쟁 기간 중과 후의 선조의 행보야 말로 정말 질투의 화신. 무능의 화신이라고 할만 하다.  

마지못해 광해군을 세자로 세웠는데 도망만 가는 자신과 달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기대 이상으로 자신의 일을 충실히 행하여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광해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한참 전쟁 중인데 선위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게 옳은 짓이었나? 차라리 그 때...광해군에게 선위를 해버리는게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을 질투하여 그 지위를 흔들어 불난의 씨앗을 만들고, 승승장구하던 이순신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고 끝까지 도망자 원균을 더 총애했으며,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에게는 감사의 인사 따윈 없었다. 오직 자신을 쫓아 같이 피난 갔던 대신들만 공신으로 임명하는 등.."뭐 저런 게 다 있어?" 싶은 일들만 잔뜩 만든다.    

이순신과 여러 의병장들 그리고 이름없는 백성들. 그들이 없었더라면 조선도 없고 자신의 왕이라는 자리도 없었을 것을..자신의 무능이 드러나는게 싫었던 걸까? 나라를 위해 피 흘린 자들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린 그에게 한게 뭐가 있다가 '선조'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참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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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9 - 인종.명종실록-문정왕후의 시대, 척신의 시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9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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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죽고 난 후,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인종이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여 여섯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고, 많은 신하들로부터 성군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받으며 자란 인종. 하지만 그의 기반은 약한 편이었다. 작서의 변이나 식중독 사건 목패 사건 등등을 보면 딱히 편안히 자리에 앉아있었던 인상은 아니다.  

아버지 중종의 장례를 유교식 예법에 따라 치루다가 몸이 허약해져서 즉위한지 얼마 안되서 아버지를 따라가버린다. 똑똑하고 인정이 넘쳤던 그가 조금 더 오래 임금 자리에 앉아있었더라면 어땠을가?  

인종이 죽은 후에, 문정왕후 소생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실제로 왕이라는 이름만 쓰지 않았지 문정왕후가 왕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했다는 야망을 뺀다면, 딱히 비난받을 일은 없었다고본다. 오히려 남편인 중종보다 정치를 더 잘하지 않았던가? 중종 때 비하면 피도 적게 흘린 편이었다. 한계라면 자신의 측근들을 통하다보니, 측근들의 권력이 커지면서 비리가 터졌다는 것 정도?  

그럼에도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사관들의 비난은 만만치가 않다. 책에도 나와있지만, 그녀가 여자였다는 것과 불교를 되살리고자했던 일 등 때문인 것 같다.   

한편 명종은 어떻게 보면 불쌍한 임금이다. 평생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이제 자신만의 색깔로 좀 정치를 해볼 수 있겠구나 싶을 때 세상을 등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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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 중종실록, 조광조 죽고... 개혁도 죽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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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난 후, 임금이 된 중종. 중종은 태종이나 세조처럼 자신이 직접 칼을 뽑고 임금의 자리에 앉은게 아니라, 칼을 뽑은 신하들에 의해 임금 자리에 앉혀졌다.  

강력했던 형 연산군이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는 걸 봐야했던 중종은 자신의 자리 보전에 많은 신경을 쓴다. 초기엔 반정의 주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박원종 등에게 기댈수 있어 안심이었으나 그가 죽고 난 후가 문제였다.  

비어버린 보디가드 자리를 누구에게 맡길것인가?  

중종은 자신을 지켜줄만한 사람에게 총애를 아끼지 않아 권력을 몰아준 뒤, 영- 아니다 싶으면 헌신짝 버리듯이 던져버리고 다른 이를 찾았다.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금자리 지키기의 일환으로 총애하다가 숙청해버리는 등의 일을 반복하다보니, 옥사는 폭군이라던 연산군 시절보다 더 많았고 39년이라는 긴 제위기간 동안 결국은 제자리 걸음 밖에 할 수 없었다.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숙청 과정에서의 중종은 나름 결단력과 과격성을 지니고 있었다. 자리 지키기 말고 좀 더 구체적으로 다른 일에 그 결단력을 사용했더라면 어땠을까?  

대군 시절부터 눈에 나지 않기 위해 익혔던 처세술이 임금이 된 후에도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환경 탓을 조금 해보지만, 그래도 딱히 불쌍하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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