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더 레이지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4
커트니 서머스 지음, 최제니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작년에 영화 「한공주」를 보고 온 친구가 말했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한공주」를 ‘꼭 봐야 할 영화!’, ‘최고의 영화!’라고 표현하면서 앞으로 어떤 영화와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이 영화만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며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친구의 강력한 추천에도 나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영화를 보지 못했다. 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되짚어보니 영화를 보면 밀양에서 일어났던 집단성폭행 사건이 나와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오롯이 내 이야기가 될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다. 두려움이란 단어에서 비겁한 냄새가 나 얼굴이 화끈거린다.

 

 

《올 더 레이지(2015.10.20. 미래인)》의 책 소개를 보았을 때 유독 크게 보이는 글자가 있었다. 바로, 가슴 아픈 미국판 ‘한공주’ 이야기라는 문구였다. 비겁하게 다시 못 본 척,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다.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올 더 레이지》는 유독 빨간색에 집착하는 ‘로미 그레이’가 등장한다. 로미는 자신을,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로미의 주변인들인 친구들 역시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미의 단짝친구 페니까지도 말이다. 로미는 학교 안에서 배척당하고 있었다. 이유가 뭘까?

    

 

이야기는 ‘그녀’라고 지칭되는 누군가가 강간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를 강간한 켈란은 지역 유지의 아들이다. 그래서였을까. 가해자인 켈란은 피해자인 그녀의 모함을 받는 피해자가 되었고, 피해자인 그녀는 가해자인 켈란을 모함한 가해자가 되어 거짓말쟁이, 헤픈 년이라 불리며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들의 비난과 냉대는 부당했지만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런데 그리브 고등학교의 전통행사인 졸업파티가 열린 날 밤, 두 명의 여자 아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실종된 두 명의 여자 아이 중 로미는 다음 날 아침 집으로 돌아왔지만, 다른 한 명의 여자 아이는 돌아오지 못한다. 실종된 여자 아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반대로 살아서 돌아온 로미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로미는 페니를 그리워하는 학교 친구들, 마을 주민들을 바라보며 페니 대신 자신이 실종됐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실종되었던 여자 아이 페니 영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살인자를 검거하며 사건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누구도 로미가 말하는 진실을 사실이라고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한 번 찍힌 낙인의 굴레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가 되었다.

    

 

소설은 성폭력, 성폭행이 한 인간을 잔인하게 파괴하는 폭력임을 알린다. 로미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인간이 얼마나 무자비해지는지 알린다. 로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잔인무도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 또는 나의 가족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무기력한 나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해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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