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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 첫 만남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2008 골든 글로브 각본상에 이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영화 <파고>로 유명한 코엔 형제가 감독이라는 사실과 제목에서 느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지함에 이끌려 나는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영화의 원작 소설,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다시 만났다.
# 영화에서의 만남 혹은 소설에서의 만남
가끔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을 만난다. 소설이 먼저인지 영화가 먼저인지, 어떤 장르를 먼저 만났는지, 만남의 선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끔은 둘 중 하나에게서 실망감을 느껴 도리어 좋았던 첫 느낌마저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영화에서의 느낌과 소설에서의 느낌이 일치하는 경우에 속한다. 다만 충격적인 첫 장면을 비롯하여 흥건한 피, 시체 주위의 파리 소리, 살인자의 외모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섬뜩함과 오싹함은 비주얼이 강하게 작용하는 영화에서 더 강렬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작품으로의 접근에 욕심을 내려면 영화보다 소설을 먼저 읽는 게 효과적일 듯싶다.
# 모스
어느 날 갑자기 수중에 들어온 돈 가방에 횡재한 기분은 잠시, 그는 이 돈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돈을 포기할 생각 따윈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것이 아니었지만 이제 그의 것이 된 돈 가방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도주를 시작한다. 그가 지키려고 한 것은 대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닌 걸까.
# 벨
전쟁에서 전우들을 살리지 못하고 혼자 살아왔다는 죄책감을 가슴에 담고 사는 늙은 보안관. 그는 그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한 보안관이지만 능력 면에서는 부족한 보안관이다. 그는 모스를 도우려고 생각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남은 것은 실패했다는 쓸쓸함뿐이다.
# 시거
타인의 목숨을 가벼운 동전 던지기 게임으로 결정하는 이상한 원칙의 소유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우연이 필연이라도 되는 듯 강요하는 그의 원칙이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그에게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타당성을 갖춘 논리이다. 정해놓은 원칙에 따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모스를 뒤쫓는 그는 이 소설 속에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다.
# 노인
이 작품을 처음 접하였을 때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바로 노인이었다. 노인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며, 노인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작가가 노인이란 단어에 상징성을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독자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소설 속으로의 무한한 참여가 가능하도록 말이다. 그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무력한 노인이 되어 버린 보안관 벨처럼 노인은 단순히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늙은 사람을 뜻할 수도 있다. 또는 남의 물건을 훔쳐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도망자 모스처럼 노인은 어리석은 자를 뜻할 수도 있다. 또는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냉혈인, 살인자 시거처럼 노인은 악한 자를 칭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노인은 이 소설의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씁쓸함을 느꼈다. 악한 자는 아직도 생존해 있으며 약자는 강자의 손에 죽어 사라졌고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자는 인생에서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끼며 뒷방으로 물러나 않는다. 정의의 이름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런 답답한 상황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그러하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만 탓하면서 인생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서 무엇부터 시작해야할지 생각해야 한다. 후회 없는 삶, 작가 역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 아닐까. 내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도 후회하지 않을 삶, 그것만이 삶에서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