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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웨어 ㅣ 판타 빌리지
닐 게이먼 지음, 나중길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을 때 가끔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에 빠질 때가 있다. 그 때는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고 영원이 순간처럼 느껴진다. 나를 포함하고 있는 공간에는 나와 책만이 존재한다. 적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짙은 외로움만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빈 공간, 그 공간에서는 오직 나만이 주인공이다. 어느 순간 책에 집중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오로지 책이란 문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기분 좋은 느낌, 깨어나고 싶지 않은 느낌, 그 감정을 좋아한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이런 감정에 빠졌는데, 이 책 <네버웨어>를 통해서였다.
<네버웨어>는 인간이 전부라고 믿는 현실과 인간은 볼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을 때론 재미있게 때론 신비롭지만 두렵게 그려낸 판타지 소설이다. 평범하던 일상이 한 순간 엉망이 되어버리고 자신이 속해있던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까. 꿈에서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 그러나 한 번쯤 겪어보고 싶은 일, <네버웨어>의 주인공 리처드의 시선을 쫓아가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의 여행이 가능하다.
사실 두 개의 런던이 있네. 자네가 살던 런던 지상과 세상의 틈으로 굴러 떨어진 사람들이 사는 런던 지하가 있지. p187
이 책은 길 가던 노파가 리처드에게 '문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을 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후 리처드는 우연히 길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아가씨를 발견하고 그녀를 도와준다. 그런데 바로 그 때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처음부터 자신은 세상에서 없었던 사람인 듯, 현실에서 제외되어 버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왜 이런 일들이 발생했는지 알기 위해서 그리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자신이 도움을 준 사람들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 길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하고 간단한 여정이 아니다. 생명의 위험을 느낄 만큼 험난한 시련의 길이다.
이 소설 속 런던 지하 세계는 리처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비현실적이고 비정상적으로 다가온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소녀, 쥐의 말을 하는 사람, 용감한 여자 경호원, 괴수, 살인자와 천사 등의 등장인물을 비롯하여 공간적 배경으로 그려지는 잊혀진 지하철 역, 즉 버려진 지하철 역 역시 그러하다. 또한 지하 세계에서의 어둠과 안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다르다. 지상 세계 사람이 비현실적이고 비정상적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은 지하 세계 사람에게는 현실적이며 정상적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런던 지상과 지하 세계 모두 선과 악이 공존하고 비밀과 의혹이 공존한다. 동일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두 세계에서 리처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정작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곳은 지하 세계이다. 지하 세계에서 힘든 상황을 극복해 나가며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그것이 진실한 모습이라고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 안전하다는 감정을 갖게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안전 속에서 행복도 유지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무엇이 진정한 안전이고 행복인지, 무엇으로부터 안전과 행복을 얻을 수 있고 지킬 수 있을지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인간이 사실이라고 믿는 현실은 어쩌면 온전한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만이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리처드처럼 용감하게 자신의 앞길을 선택하고 결정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영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가 떠올랐다. <판의 미로>에서 주인공은 어디든 그리는 대로 문이 생기는 마법의 분필을 갖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분필을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답답할 때면 아무 벽에나 문을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 동화의 세계로 떠나고 싶다는 상상을 했었다. 그러나 반드시 행복만이 가득한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나,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면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용기내서 그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