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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집 1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6월
평점 :
품절
흐느껴 울었다. 꿈을 찾아 떠난 길목에서 꿈은 찾을 수 없고 고통과 혼란만이 나를 기다린다. 아니, 내게 꿈이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서글프고 허무하다.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계속 울었다.
지금 당장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살기 위해 살고 있는 건지, 죽기 위해 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내 인생이 나를 지치게 만든다. 비어있는 삶의 중심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아니 화가 난다. 치열하게 소유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그 어떤 것도 버리려고 하지 않는 나는, 지금의 나를 잃어버릴지언정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그리움을 찾아 떠날 용기가 없다. 내가 내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나를 다시 살릴 용기가 없다.
소설 속 인물들은 처절할 정도로 슬프고 괴롭다. 그들의 여로가 힘들어질수록 나 역시 힘들어졌고, 그들이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나 역시 죽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 너무나 힘들어서 중간에 읽기를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게 내가 찾길 원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챈 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가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너무 빨리 가지 말라고,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마음을 추스를 여유를 달라고 말이다.
<침묵의 집>은 실존의 위기감을 느끼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등장인물 중 어떤 이는 일탈의 긴 여행을 통해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 여행이 자멸로 가는 길임을 이미 알지만 두려워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다. 이와 반대로 다른 이는 젊음 뒤에 바짝 다가와 있는 죽음을 알아보지만 죽음의 그늘을 피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일상의 탐욕을 쫓는 관습적 삶을 거부하고 실존적인 자유를 찾아 떠날 용기가 없음에 절망감을 느낀다. 여행을 떠나는 이와 떠나지 못하는 이, 모두에게 연민을 느낀다.
박범신의 소설을 읽으면 울적해진다. 그와의 만남은 촐라체에 이어 두 번째이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비슷했다. 그의 글과 대면하는 순간 애써 마음 한구석에 쳐 박아 두며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늙음과 죽음, 자유와 자아 등의 명제가 눈앞으로 둥실 떠오른다. 그들이 내 앞에 나타남과 동시에 나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계속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제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박범신의 소설은 중독성이 있다. 읽는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다시는 그의 작품은 가까이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눈길이 가는 건 분명 중독되었기 때문이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작품이 그리워질 듯하다. 그리움에 이끌려 또 다른 작품을 손에 들었을 때 다시 힘들어지더라도 나는 그 힘듦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또 만나자고 조용히 읊조려 본다.
1권
할 수만 있다면 소주의 독한 화살로 심장을 찔러 나를 죽이고 싶었다. (...) 소주 한 병 더 줘요. 나는 소리쳤다. (...) 실존의 위기감이 나를 사방에서 옭아매고 있었다. 나는 발 밑을 보았다. 내 발 밑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갈 곳도 죽을 수도 없는, 통나무다리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서워졌으며 또 비참했다. p172
아버지라는 이름이 가진 두 가지 얼굴이 있다면 책임과 권위일 터였다. 사람들은 우리의 아버지들이 무뚝뚝하고 비민주적이며 독선적인 권위주의 망토만을 걸치고 있다고 말했다. (...) 내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큰애도 딸애도 나를 보는 기본적 인식은 그것이었다. 아내를 중심으로 두 아이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가도 내가 들어서면, 지금 들어오세요... 인사 한마디로 끝이었다. 애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말이 안 통해... 라고 그들은 말했다. 말해보려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의 권위는 인정 안 하는 그들이 아버지의 책임만을 무한 강조한단 말인가. p202-203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 이 글을 쓰는게 아니었다. 이야기의 끝물쯤에 이르면 아버지의 참된 정체성에 도달하게 될까. 아버지의 정체성이 확인되고 나면 그렇게, 이 불온한 21세기의 벽두에 선 나의 정체성도 아마 확인될 것이었다. 내 작업에 거는 기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p225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 속에 등장하는 하이에나는 곧 킬리만자로 그 자체였다. 일상의 탐욕이나 쫓아다니는 관습적 삶을 헤밍웨이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 마리 하이에나는 거부했던 것이었다. p319
2권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침묵 안을 꽉 채우고 있지만, 핑갈의 동굴에 이르러 내가 만난 것은 바로 그것, 원형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부드럽고 단단한 고요였다. (...) 삶과 죽음이 아퀴를 지어 만나는 고요라고 하면 과장일까. 일찍이 천예린이 말한 바 있는 우리의 중심, 북극해 수심 수천 미터 바다 밑의 단단한 고요, 지상의 삶에선 도달할 수 없는 부드러운 침묵의 집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우리 삶이 얼마나 잡다한 소음에 둘러싸여 있는가 하고 나는 느꼈고, 소음이 없으니 원형을 보게 되는구나 하고 또한 나는 느꼈다. p129
스카이 섬을 여행하며 아버지가 스스로 외치기를, 사랑을 좇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 너머의 참다운 자유를 좇아 당신이 여기 왔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눈시울을 붉혔다. 사랑은 자유를 향한 여로였던 셈이고, 참된 자유는 참된 자아의 동의어일 터였다. 아버지의 모든 걸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내 본래의 의도가 무위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내 영혼이 아버지를 통해 인생의 바다로 나아갔으므로. p153
청춘은 자기에게 모반하고 싶어하는 것. (...) 그것은 아버지를 비유한 대사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오십대에 마침내 자기 인생에 대한 극적 모반의 찬스를 잡았으나, 젊은 우리들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결단코 그런 찬스를 잡지 못할 것만 같았다. (...) 봄이면 꽃피고 가을이면 잎지듯 너무도 뻔한 일상의 순환이 계속되리라는 거. 반란과 모반은 죽을 때까지 절대 불가능하리라는 거. p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