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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새벽 5시 10분 세상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 퍼런빛이 감도는 창밖을 한참 쳐다보다 문을 활짝 열었다. 갑자기 침입한 차가운 공기 때문에 오싹함을 느끼지만 도리어 그 서늘함으로 인해 정신은 또렷해지고 기분은 좋아진 듯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새벽공기인가. 정말 오랜만이지, 툭 인사를 건네 본다.
촐라체, 참 매력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멋진 녀석을 만나 나는 얼마나 더 행복해 질까를 상상하다, 들뜬 마음을 추스르며 읽기 시작한 게 어제였는데 밤을 꼴딱 새고 아침이 되었다. 지금 잠들면 촐라체 북벽에 매달려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될 것만 같아 잠자리에 들기가 두렵다. 나는 춥고 무서운 건 질색이거든.
촐라체는 생명을 품고 있다. 그 생명은 산 사람의 것일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의 것일 수도 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생명이 공존하는 곳, 그 곳이 바로 촐라체이다. 촐라체 앞에서는 꾸미거나 허세를 부릴 수 없다. 그 곳에서는 자신에게 또는 타인에게 솔직해지고 진실해진다. 평소에는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 마음 깊숙한 곳으로의 여행이 가능한 게 촐라체이다. 오래 묻어둔 슬픔, 꺼내기 힘든 상처를 그곳에서는 마음으로부터 내려놓는 용기를 낼 수 있다. 삶의 의지를 되찾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곳이 또한 촐라체이다. 이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곳이 촐라체이지만 이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곳 역시 촐라체이다. 이를 깨닫는데 감수해야 할 비용은 너무나 크다. 값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가야할 만큼 촐라체로의 여행은 가치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은 소설 <촐라체>에서 찾을 수 있다.
겨울을 맞은 촐라체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발견할 수 없다. 모두가 외면하는 겨울 촐라체에 홀연히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겨울 빙벽을 오르려는 두 형제 박상민, 하영교와 두 사람을 지켜보는 화자 '나'가 그들이다. 그들이 산을 찾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산에서 얻고자 하는 건 동일하다고 느꼈다. 사연 많고, 굴곡 많은 그들의 삶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산뿐이며,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돌덩이를 잠시라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도 오로지 산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산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가 보다.
처음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불안함을 느꼈다. 안자일렌 상태로 빙벽을 오를 계획인 두 사내의 삐걱 거리는 모양새는 형제라는 관계 뒤에 말 못할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고, 화자인 '나'와 박상민의 묘하게 닮아있는 생의 그늘이 촐라체의 차가운 기온을 더 떨어뜨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화합할 수 없을 듯 보이던 그들은 어느새 서로의 존재에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다. 촐라체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이유 역시 혼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그들은 깨닫게 된다. 자신 혹은 타인을 아프게 만드는 능력을 인간이 가지고 있지만 그 상처를 낫게 하는 능력 또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만, 누구든 쉽게 알 수 없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인간의 삶은 홀로 지고 가야 할 몫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쓸쓸하고 고독한 길에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음이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게 하는지 말이다.
하루하루 목숨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고만 여기던 두 형제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쉬운 그 곳 촐라체에서 죽음을 느꼈을 때 '살고 싶다'를 외친다. 눈을 감고 잠들듯, 꿈속에 빠져들듯,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그 곳에서 그들은 강렬한 생에 대한 집념을 느낀다.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 삶에 대한 애착은 꼭 그런 극한 상황에 다다랐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이 느꼈던 감정과 똑같은 감정을 나도 느끼고 싶다. 죽고 싶은 욕망 이상으로 강하게 나를 사로잡는, 살고 싶은 욕망을 나도 느끼고 싶다.
작가는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현대인에게, 또는 자본주의적 안락에 기대어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하는 젊은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p10)'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든 걸 이해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고 자신한다. 나 역시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고, 아주 쉽게 꿈을 포기했기에. <촐라체>로 가면 그리워서 텅 비어버린 가슴을 꽉 채울 수 있으리라. <촐라체>로 가면 그리운 대상을 찾을 수 있으리라. <촐라체>로 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