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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판도라의 상자를 아시나요. 판도라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 신으로부터 받은 상자 하나를 가지고 옵니다. 어느 날 호기심이 발동한 판도라는 절대로 열면 안 된다는 신의 당부를 무시하고 상자를 열기로 결심합니다. 상자 안에는 질병, 재앙, 슬픔, 아픔, 괴로움, 미움 등 온갖 나쁜 것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나쁘다는 감정을 모르고 지내던 인간들은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간이 흐른 후 인간들은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판도라의 상자 맨 밑에 있던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나쁜 일, 힘든 일이 있더라도 인간에게는 마지막에 희망이 찾아옵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살 수 있었던 게지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소설 [연민]은 희망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한 가정에 젊고 멋진 남성이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호프밀러는 쥐꼬리만큼 받는 장교(소위) 월급과 큰어머니가 매달 얼마씩 보내 주시는 돈으로 생활하는 가난한 청년입니다. 그런 그는 자신을 대단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귀족집안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바로 케케스팔바 씨입니다. 귀족의 성에는 늙은 아버지 케케스팔바와 딸 에디트, 조카 일로나가 살고 있습니다. 오래 전 케케스팔바의 성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습니다. 아내가 죽고 어린 딸은 장애인이 되어 걸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케케스팔바의 성에는 돈과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아픔, 슬픔, 고통, 의심 등 모든 게 존재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희망만이 없었습니다. 그 희망을 가지고 온 자가 바로 호프밀러입니다. 호프밀러는 자신이 그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데 짜릿함을 느낍니다. 자신을 미비한 존재로 여겼던 그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단지 그 기분에 도취되어 그는 의도하지 않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판도라 역시 세상에 나쁜 것들을 보낸 게 의도했던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요. 케케스팔바의 가족들은 희망을 보았고, 그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욕심을 내면서, 그 욕심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끝내 절망이 이르게 됩니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호프밀러가 케케스팔바 씨 집에 드나들면서 가졌던 처음 감정은 연민, 동정심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데 우쭐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행복해서 그 또한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에디트에게 생각지 못한 고백을 받게 되면서 그는 혼란스러워집니다. 아니 당황했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숙하지 못한 그의 마음은 장애인인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서 혹시나 그녀가, 그녀의 가족이 그의 진심을 알지 못할까봐 동분서주합니다. 하지만 희망도 때가 있나 봅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케케스팔바의 집안으로 희망이 오려는 찰나, 상자는 닫히고 맙니다.
결단력 없고 책임감 없는 호프밀러와 대조되는 인물로 작가는 의사 콘도르를 등장시킵니다. 그는 자신이 치료하다 눈이 먼 맹인과 결혼합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려고 또 누군가는 맹인 여자의 재산이 탐나서 결혼했다고들 하지만 그녀 옆에 있는 콘도르는 슬퍼 보이지 않습니다. 불행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연민이 사랑의 출발선이었다 하더라도 결승선은 결코 연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종류가 여러 가지 이듯 사랑의 정답 역시 없습니다. 어떤 방법이 옳다 그르다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처 받지 않고 상처 입지 않는 사랑이 누구나 원하는 게 아닐까요. 나 역시 그러니까요.
이 작품은 1939년에 출판된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입니다. 그의 작품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문체는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표현한 그의 문체에 빨려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알게 된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의 인연의 끈을 이대로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나의 이 마음은 어쩌면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호기심일 지도 모릅니다. 어쩐지 그의 생은 불행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입니다. 어서 그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