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연

주중에는 기계 언어를 풀이하고, 가끔 인간의언어를 번역하며, 드물지만 자기 언어로 글을쓰기도 한다. 취미는 여전히 단어 모으기. 에세이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를 썼고 나의 친애하는 불면증』을 옮겼다. - P-1

가난하지만 않을 뿐 부를 갈망하는 가진 것 없는젊은 커플에게 이보다 더 곤란한 상황은 없을 듯했다.
그들은 수준에 맞는 정도만 갖고 있었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 P-1

빈곤 프리미엄poverty premium이라는 말이 있다. 가난한사람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시간도 돈도 더 많이쓰게 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내가 겪어본바 가난한 삶에는실제로 더 많은 비용이 따른다. 가난은 밑 빠진 독과 같다.
아무리 부단하게 노력하며 발버둥 쳐도 모든 것이 원점으로되돌아간다. 열심히 사는데도 남는 게 없다. 오히려그럴수록 돈 들어올 길은 막히고 돈 새는 구멍만 커지는 것같다. 숨만 쉬어도 빚이 쌓이는지 늘 부채감이 따라붙는다.
어디서부터 쌓인 빚일까? - P-1

☆ 하루 9만 원인 개인 간병인을 50일 동안 고용했다. 간병비는현금영수증조차 발급되지 않는다.
☆☆ 절도죄로 장발장을 감옥에 가둔 문제의 빵. 도대체 얼마나대단한 빵이길래 투옥까지 당했는지 궁금하다면 구글에검색해보라. 지름 30센티미터가 넘는 솥뚜껑만 한 빵 사진을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P-1

엄마는 병실에서 돈 이야기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언제나 돈이 급한 쪽도, 내게서 빌려갈 돈의사용처와 지키지도 못할 상환 계획을 상세하게 늘어놓으며말꼬를 트는 쪽도 엄마였다. 듣다 못한 내가 "나도 돈 쓸곳이 있다"라든가 "그래서 언제 갚을 수 있다는 거냐"라고한마디 덧붙이면 엄마는 "사람들 다 들을 텐데 쪽팔리게만들 작정이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렇게 나를 몰아세울때마다 기가 막혀 당혹감을 넘어선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럴 거면 말을 꺼내지 마. 애초에 가난하지를 말든가 - P-1

되감기 하자면, 우리 엄마는 무심한 모친과 폭력적이고이기적인 오빠들로부터 벗어날 요량으로 20대 후반에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후 나름대로 생계를 - P-1

사람들이 생각하는 ‘빈자다운 삶‘이란 어떤 모습인걸까? 해외여행은 엄두도 못 내고 빛이 들지 않는반지하방에서 은둔형 외톨이처럼 자신을 가두고 사는사람? 매일 폐기를 앞두고 할인에 들어간 간편 식품이나도시락 따위로 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사람? 명품 가방같은 건 분수에 맞지 않으니 애초에 탐하지도 않는 사람?
가난한 사람은 더 넓은 세상을 꿈꾸거나 원해서는 안 될까?
욕망할 권리,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혹은 소비)할 권리도어딘가에서 돈으로 사야 하는 것인가? 선택의 정당성을판단하는 주체가 본인이 아니라 타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은 그의 잘못인가? 그를 탓할권리는 어디서 오는가? 그 권리마저 돈으로 사는 것일까? - P-1

돈을 어떻게 쓸지는 그 돈을 손에 쥔 사람이 결정할문제다. 세금이야 내가 국민으로서 국가의 존속과 운영을위해 기여한 바가 있으니 그 돈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감시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게 누군가의 기본권을보장하기 위해 그의 손에 쥐여졌다면, 그가 그 돈을 어디에어떻게 쓰기로 하든 ‘형편‘이나 ‘자격‘이라는 단어를들이밀며 양심을 운운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감히 내가 낸돈을 그런 데 쓰느냐고 역정을 내는 것은 기업의 주식을사는 투자자의 논리다. 그러한 개입과 비난이 정당하다고생각된다면 이는 사람을 재화로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의계산을 앞세운 위선이다. - P-1

경제학자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합리적인 결정만 내린다면 자본주의사회에 가난한 사람은없을 거라고. 당장 한 푼이 아쉬운 판에 동일한 상품을4만 원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굳이 5만원에 파는 업체와 거래하는 나를 경제학자들은 이해할 수없겠지. 하지만 고정 수입이 없는 내게 이 소비는 4만 원과5만 원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4만 원과 1만 원 사이의선택이었다. 다음 달까지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보려는것이기 때문이다. - P-1

그리고, 이 얘기까지는 정말 안 하고 싶지만, 5개월할부로 5만 원짜리 소비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일단일시불로 결제해둔 뒤, 카드대금 정산일이 지나 고객센터로 전화를 건다. 그다음 해당 항목에 대해 분할납부를 신청한다. 그러니까, 9월 청구 금액이 9월 1일에서30일까지 결제한 금액을 합한 것이고, 그걸 10월 15일쯤납부해야 한다고 치자. 위에서 예시로 든 5만 3000원짜리장바구니를 9월 25일쯤에 일시불로 결제한다. 그리고 - P-1

공항에 가는 김에 좋아하는 향수를 구매했다. 네 형편에향수 같은 사치품을 살 때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향수는 의복의 연장선에 있는 물품이요, 사회적 매너를따르기 위한 수단이다.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 내 작고하찮은 존엄을 지키고 타인의 쾌적한 환경을 해치지 않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다. 적절한 사회화를 거친도시인이라면 집을 나설 때 응당 맨몸으로 나서는 대신의복을 걸치듯, 나는 향수를 뿌린다. - P-1

언니한테는 언니 냄새가 나, 섬유유연제 냄새도 아니고,
뭔지 모르겠는데 뭔가 언니 특유의 냄새가 있어. - P-1

향수를 뿌리고 다니지 않았던 시절이라 당시에는 내체취를 말하는 것인가 보다, 나쁜 냄새는 아니니 나를끌어안고 킁킁대는 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일이 있고 한참이 지나 옷장 서랍에 넣어뒀던 반팔티를꺼내다 ‘언니 냄새‘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옷장깊숙이 밴 퀴퀴한 반지하 냄새였다. 냄새의 정체를 깨달은순간, 옷장 앞에서 얼굴을 붉힌 채로 한참 서 있었다. - P-1

그렇게 향기 막으로 나의 연약한 처지를 보호해주는 나의갑옷, 나의 향수. - P-1

과거 경제에서는 소비보다는 일이 정체성을 결정하는중요 요소였지만 지금 같은 소비 중심 사회에서는정체성이 무엇을 생산하는가보다 무엇을 소비하는가와관련 있다. 소비 중심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은 여가시간을 돈 쓰는 일에 사용한다는 것과 물건을 소유하는일이 행복의 주요 수단이라는 믿음이다.* - P-1

어떤 세상은 존재를 모르고 사는 게 나을 때도 있다.
「매트릭스」의 빨간 약처럼, 앎은 자유가 아닌 고통의동의어일 때가 더 많다. - P-1

나는 내가 사회학 전공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회학은 내가 나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있는 언어를 알려주었고, 조직이자 유기체로서 사회가 그구성원인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반대로 개인으로서내 존재는 사회에 어떤 의의를 갖는지 이해하게끔 했다.
불합리하게만 느껴지는 세상을 향해 옹알이조차 못내뱉던 내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를 쥐여준 학문도사회학이다. - P-1

가난 이야기에서 늘 회자되는 작품인 박완서 선생의「도둑맞은 가난」 속 ‘나‘는 멕기(도금) 공장에서 만난상훈이 실은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자란 부잣집 도련님이란사실을 알고 분노한다. 자신에게는 일상이고 삶인 가난을한낱 체험학습의 장 취급하는 부자들의 오만에 치를떤다.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차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자신에게는삶 자체인 환경이 누군가에게는 인생 교훈을 가르치는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주인공의심정을 나도 이해한다. 그는 빈곤을 소명이라고까지 생각할만큼, 가난을 정체성을 구성하는 큰 부분으로 여긴다. - P-1

싶었다. 가난은 뗐다 붙였다 하는 스티커가 아니라문신처럼 세포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성질의 무언가라는것을 미처 몰랐다. 아니 모르고 싶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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