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
봄 어느 날 마당 귀퉁이를 일구고 거름흙을 섞어 아버지가 만드신 한 평짜리 꽃밭에 나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꽃모종을 얻어다 심었습니다. 꽃들은 좋아라 잘자랐고 꽃송이도 제법 많이 달아주었습니다. 비 오는날 같은 때, 아버지는 새로 꽃핀 그것들을 신기한 듯 유심히 바라보곤 하십니다. 살림에 찌들은 깊은 주름살에도 꽃물이 들어, 오랜 중풍으로 병든 신경에도 풀물이들어, 어쩌면 꽃들이 아들딸로 보이시는가...... 아버지는 생땅에 일군 꽃밭이고 우리 형제는 그 꽃밭에 피는꽃송이들. 그렇게 바라시는 마음, 그렇게 바라며 사시는 하늘 같은 마음아. - P-1
목숨 가진 한 사람이 목숨 가진 한 사람을 알아준다는 것 - P-1
여보, 아는 사람들 만나 끼니때가 되거든 밥이라도자주 먹읍시다. 우리가 세상에 없는 날 사람들 우리더러 밥이라도 같이 먹어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 P-1
여보, 우리가 가진 것 둘이 있다면 그중에 하나는남에게 돌립시다. 우리가 세상에 없는 날 사람들 우리더러 자기가 가진 것 나눈 사람이라는 말이라도할 수 있게. - P-1
여보, 무언가 하고 싶은 말 많은 사람 만나거든 그사람 말이라도 잘 들어줍시다. 우리가 세상에 없는날 사람들 우리더러 남의 말 잘 들어준 사람이라는말이라도 할 수 있게. - P-1
마을 어귀나 뒷동산에 초가지붕들을 굽어보며 꾸부정히 서 있기 마련인 소나무라면, 수절과부와 홀아비의 외롭고 추운 잠자리들을, 이 마을 사람들의 가난한꿈과 방물장수 할머니의 유리표박流離漂泊까지를, 함께달래어 흥얼거리는 콧노래쯤 아닐 건가. - P-1
산중도 봄이 되니 풀이 푸르오. 머언 산, 가까운 산, 산들은 원근에 따라 짙고 옅은 속옷을 갈아입었소. 산새들의 짓거리며 목청도 많이 달라졌소. 쫓기고 쫓으며 산새들은 낭랑한 은방울을 흔드오. 산중의 햇볕은이제, 껍질 벗긴 호두 속알처럼 오밀조밀하고 고소하오. - P-1
야들야들 미루나무 속잎새 하나하나에 여린 햇빛이와 부서지는 거, 여린 바람이 와 손바닥을 까부는 거, 이윽히 바라보아 아, 때때로 우리가 눈물 글썽여짐은, 눈물 글썽여짐은- - P-1
어디 그게 할 말이나 되냐고, 첫애기 잘못되어 여러번 수술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지, 어디 그게 당신. 냐고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러느니 차라리영아원에 가서 아이 하나 데려다 기르며 같이 살자고, 왜 이런 슬픔이 우리 것이어야만 하느냐고, 남들이 듣지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더욱 작은 울음소리로 느껴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 P-1
보리가슬
고개, 높은 고개 넘어오다가 숨 가빠서 뻐꾸기 울음소리 되고 우르르 한 무더기 상수리나무 숲이 되고 고샅길 삐쳐서 달려가다가 그만 나루터에서 은비늘 파닥이는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바람은. 바가지로 건질까, 조리로 건질까. - P-1
시 제목 ‘보리가슬‘은 보리 가을, 즉 보리 벨 무렵이란 뜻 - P-1
아 글쎄 봄에는 예쁜 풀꽃 바구니 머리에 받쳐 이고종종걸음 내게로 걸어오시는 예닐곱 살짜리 계집애의산이더니, 여름에 산은 부쩍 성숙한 예비숙녀로 자라 챙이 넓은 흰 모자에 팔 없는 흰 블라우스를 차려입고 한눈 찡긋 손 까불러 나를 부르시는 게 아닌가! - P-1
하느님은 청소부, 사람들이 아무리 닦고 쓸어도 다는 깨끗이 치우지못하는 골목 안 쓰레기들을 간밤에 비를 내려 말끔히말끔히 치워주시고, - P-1
하느님은 아이들, 하루에도 몇 번씩 웃고 떠들며 장난질하다가도 금방심술 나면 싸우고 토라지고 울고 그러다가 또 금방 언제그랬냐는 듯 친해져서 노는 골목 안 아이들이지요. - P-1
선생님 생각
내가 어려서 국민학교 1학년 때 담임이셨던 전갑도 선생님, 책을 읽히다가 모처럼 잘 읽는 아이가 생기면 냅다 그 아이를 둘러업고 교실을 한 바퀴 삐잉 돌면서 "책을 읽으려면 아무개같이 읽으려무나. 너희들은 모두 아무개를 본받아야 하느니라." 콧노래 비슷한 소리를 흥얼거리던 전갑도 선생님, 아이들은 선생님 등에 한번 업히고 싶어서 더욱 책을 열심히 읽어오곤 했었지. 세월 보낼수록 선생님 생각, 요즘 세상에 어디 애들 업어주는 선생님이 그리 흔할까? 나이 먹을수록 선생님 그리운 생각. - P-1
올해도 겨울 방학이 되어 외숙네 들러보니 두 내외외로운 서울 까치가 되어 추운 겨울을 춥고도 외롭게살고 있었네. 하지만 이제 서울 외숙네는 속으로 알부자. 누구네 집보다 탄탄하다 하네. 뿐인가. 서울 외숙은못 배워 무식하긴 해도 그동안 세상 사는 진짜 멋으로등산하는 취미를 길러 일을 쉬는 날마다 남한의 유명하다는 산이며 약수터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러네. 아무렴, 세상 사는 것이 별건가. 자기 나름대로 자기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지. 초로의 나이에 들었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고 보람 있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서울 외숙의 온화한 얼굴에서 비로소 존경할 만한 좋은어른의 모습을 찾아보겠네. - P-1
시래기 국밥집
한 젊은 부부가 시골에서 살길이 막막해서 도시로이사를 갔더랬네. 이사 간 날 이삿짐을 날라준 친구들과 이웃들을 대접하긴 해야겠는데 대접할 것이 도무지없어서 걱정이었더랬네. 생각 끝에 시골에서 이삿짐 속에 꾸려 가지고 온 시래기로 시래깃국을 끓여 밥과 함께상에 내왔더랬네. 그것은 기껏해야 멸치를 넣어 끓인 시래기 된장국이었더랬네. 한데 생각 밖으로 사람들이 맛나게 먹어주고 음식 솜씨를 칭찬해주었더랬네. 도시에와 별로 해먹을 만한 일거리도 없는 김에 두 부부는 여기에서 지혜를 얻어 변두리 헐어진 방 한 칸을 빌린 다음, 시래기 국밥집을 차렸더랬네. 음식점은 날로 손님들이 밀리고 번창하여 두 사람은 한밑천 크게 잡을 수 있었더랬네. 용기를 얻은 두 사람은 시래기 된장국집을 집어치우고 그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짓고 그럴듯한 갈빗집을 차렸더랬네. 그러나 그날부터 웬일인지 시래기 국밥집을 찾던 손님은 한 사람도 그 집을 찾지 않았더랬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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