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라는 명분 아래 뭔가를 시도

일견, 문제는 우리다. 단순해 보이는 이 명제는 실상 꽤 어지럽다. 문제‘는 답을 요구하는 물음‘이기도 하지만, 어떤 행동이나상태 등에 대한 가치판단의 결과로서 ‘잘못‘을 뜻할 수도 있다. 한

동기와 의도 없이 우발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른바 ‘묻지마 폭력‘ 이 기실 여성, 어린이, 장애인, 성 소수자, 이주민 등과 같은 약자를 겨냥하며 일어나는 ‘혐오 범죄‘와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이 피해자일 경우 선량함과 무결함과 같은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에 합치하지 않는 것은 치명적이다. 여성의 옷차림과 태도를 지적하며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교묘히 돌린 후 사생활까지 함부로 파헤치고 나면 사태는이윽고 피해자의 행실을 기준으로 필연성을 갖추게 된다. 나가폭행 당시의 상황을 복기할 때 몇몇 구체적 사안들을 발설하는일을 망설이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폭력의 경험을 기존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함을 느꼈을대 터져나온 ‘나‘의 비명은 오래된 것이었다. 

그저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여자를 무참하게 폭행하는 포악한 범죄자뿐 아니라 맞고 있는 사람을 멀찍이서 구경하는 목격자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동선을 수색하는 경찰, 그저 조심할 것을 강조하는 애인, 피해자의 사생활을 들추고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는익명의 사람들까지

현관 앞에서부터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가 아이들과 뒤섞여

알아볼 때마다 조금씩 바뀌고, 한 번 들어서는 제대로 이해할수도 없는 아동수당과 자립수당, 주거급여와 행복주택, 뉴딜 일자리와 공공 근로 같은 여러 정책의 세부를 두루 알고 있는 선우부부가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선우와 이야기를 나눌 때

삶에 기대를 품는 것이 번번이 자신을 망친다는 결론에 이른뒤로 미애는 가능한 한 희망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욕망조차 하나의 자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희망이 있다. 희망을 가져라. 그렇게 말할 때의 확고하고 단호한 표정이 아니라,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어쨌든 한 걸음을 내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으면서도 일단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의변화, 그 변화가 불러오는 찰나의 활력과 활기를 붙잡고 싶었던것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여유를 허가받지 못한다.

그래서 종족은 더욱 강해져야 한다.
지독해져야 한다.

온 세상이 어두워진 까닭.
까치집.
까치는 흉조였다.

대화는 함바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시작된다

"헛소리 좀 작작."
사이비지, 사이비. 사이비 종교의 계략입니다."
"세상 말세다."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언론 플레이를 멈춰라!"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조류 바이러스는 인간을 감염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변이 바이러스라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올 것이다. 나는 변이 바이러스가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감염이 되면 새로 변해버린다는 괴담은 믿지 않았다.
다만, 내가 알고 싶었던 건 괴담의 출처였다.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이렇게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데,
다들 집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는데,
여전히 아파트는 계속 지어지고,
집값은 계속 오르고,
거기에 누군가 산다는 게.

새집,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같은.
이성으로 가득찬 
인간 머리통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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