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들어 있습니다. ‘양과 크기만을 재는 세상‘ 에서 ‘질과 깊이까지 헤아리는 세상‘ 으로 달라지기를 바라는 제 마음이 어딘가에서 아름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서로 관 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며 무감어수無於水라고 하였습니다. 살살 부는 산들바람에도 쉽게일그러지는 물에 얼굴을 비추어 외모를 살피기보다는, 내면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엄한 가르침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앉아서 자기를 찾겠다는 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불꽃처럼 타오를 수도 있고 꺼질 수도 있다. 그런데 불꽃을 큰 불길로 활활 타오르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노동하고 또 노동하는 것이다." 앉아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

중하여 스스로 존중받으라는 뜻입니다. 톨레랑스 olerance‘ 라는 말은 바로 이 팻말과 비슷한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즉, "(남을)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남으로 하여금 당신을 존중하게 하시오." 하는 요구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톨레랑스는 나를 존중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래

습니다. 큰 나무는 큼에 기뻐하고, 작은 나무는 작음에 기뻐합니다. 만물은 오직 그냥 그대로 ‘있음‘으로 존중받을 만합니다. 나도 그런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조건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조건을 뛰어넘는 사람만이삶을 알차게 완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만이 환경에 지지 않을 힘을지닌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치와 평가는 다릅니다. 평가란 가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지, 가치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것이 지닌

일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는 사실이 생각날 것입니다. 온 힘을 다해야만 사랑도 할 수 있고, 온 힘을 다해야만 예술도 할 수 있고, 온 힘을 다해야만 학문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한 군데에 집중하여 말입니다. 여러분은 온힘을 다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습니다. "용서를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서 해방되어 현재를 치유할 수 있다." 라는 러스킨의 말이 실감납니다.

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명심보감)도 "모든 일에 너그러움을 좇는다.
면 그 복이 저절로 두터워지리라萬事從完 其福自厚." 하고 우리를 가르칩니

니다.
법정 스님은 "침묵의 체로 거르지 않은 말은 소음이나 다를 바 없다."

좋은 교사‘란 인격적으로 훌륭하여 학생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자기 동일시의 대상‘ 이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선 수업 시간에잘 가르쳐야 합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

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조용히 지켜보는 것‘과 ‘끝까지 기다려 주 는 것 뿐인지도 모릅니다. 학생들에게는 믿고 기다려 주는 안내자가 필

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용서는 짓밟힌 꽃이 그래도 뿜어 내는 사 .
랑스러운 향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어둠을 없애는 데는 한 자루의 촛불이면 됩니다. 학교마다 그런 분이꼭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상대성 원리를 쉽게 설명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이렇 게 대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노라면 아주 먼 길이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걷노라면 가까운길도 지겹도록 멀게 느껴지는 것이 상대성 원리입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 

배려한다는 것은 ‘상대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용서입니다. 미운 사람에게는 관용, 친구에게는 우정, 자식에게는 모범, 아버지에게는 순명, 어머니에게는 미소, 자신에게는 존경,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입니다.

 광고는 그 무엇인가를 사고 싶어 못 견딜 정도로 현실을 결핍에그 가득 찬 것으로 만듭니다. 광고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그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는 칸트의 명제 형식을 빌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술에서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 이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예술에서 내용은 형식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술의 내용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삶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그 곳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늘 부족해하고 늘 목말라하고 아쉬워하는 삶이 우리를 영원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 너머에 더 있습니다."

라는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 reative destruction)‘를 역설하며 이를 기존의 생활 양식이 내부에 의해파괴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과정‘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들숨이

그런데 인간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구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데도 지구인들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구리는 짓궂은 인간이 지핀 불에 죽어 가는데, 인간은 스스로 화석 연료로 불을 지펴서 자기가 사는 지구 온도를 서서히 올리며 죽어 가고 있습니다.

고리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늦으며, 가장 길면서도 가장 짧으며,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귀중하며, 가장 소홀히 여기기 쉬우면서도 가장 후회하기 쉬운 것이 바로 시간이다."

시인 김지하는 말합니다. "혼자서 밥을 먹으면 밥맛이 없는 이유는 바로 ‘독점‘ 때문입니다. 원래 밥상에 둘러앉아 나누어 먹게되어 있는 밥을 혼자서 걸게 먹으려 하기 때문에, 본래 밥의 본질과 먹는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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