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나는 일요일 나들이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을 지나 나의 사랑스럽고 경이로운 숲으로 들어갔고, 나중에 반대편으로 나와 다시 들길과 들판, 잿빛 하늘, 나무와 집,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겨울의 추위와 죽음 속에도 따뜻한 평화가 있었고, 영원히 회춘하고 기뻐하는 태곳적의 생명이 숨어 있었다. 초록빛 언덕이 장난꾸러기처럼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내가 사는 땅을 사랑한다. 좁은 길들과 길모퉁이, 외진 곳 구석구석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얼마 뒤 나는 따뜻하게 데워진 내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이 글을 쓴다.

로베르트 발저,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中, '일요일 아침(1914년)'


책을 읽기 전에,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이라는 제목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울리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자연의 싱그러움, 혹은 따뜻함보다는 커다란 숲속에서 느껴질 외로움과 쓸쓸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고 할까.

로베르트 발저의 숲속 산책과 사유를 엮은 책. 작가는 한 걸음 떨어져 자연을 관망하고 감상하는 대신 깊은 숲 바로 그 안에서 선명한 감각으로 자연을 직접 만지고 느낀다. 그는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숲의 풍경에 투영한다. 글에서 그는 어린 소년이 되어 '숲속 깊숙이 들어가고 싶고, 숲을 갖고 싶고, 숲이 나를 가졌으면 좋겠는데 숲은 왜 나를 들여보내 놓고 다시 쫓아내는 걸까' 하며 숲을 향한 무한하고 순수한 애정과 조금의 서글픔을 드러낸다. 숲은 그를 환대해 주지 않지만 소년은 결코 숲에서 멀어질 수 없다. 소년에게 숲은, 사랑은, 쌍방의 마음이 일치할 수 없어도 결코 포기하거나 저버리지 않을 대상이고 감정인가 보다.

작가는 엄청난 상상력으로 숲과 자연을 어떤 소리, 물건, 감각 등 세상의 많은 좋은 것에 비유한다. 끊임없이 숲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자신의 여러 감정과 생각과, 숲을 연결 짓는다. 숲의 계절, 숲의 빛,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들. 현실적이기도, 환상적이기도 한 그의 표현에 어떤 글에서는 내가 숲 근처 작은 술집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기분 좋게 맥주 한 잔을 하는 듯하기도, 어떤 글에서는 아름다운 숲속에 빨려 들어가 그 일부가 되는 듯하기도 했다.

지금은 스위스의 대표 문학가로 꼽히지만 사는 동안 일정한 거처 없이 생의 마지막 28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냈고, 어느 크리스마스에 눈길을 산책하다 쓰러져 영면했다는 발저. 그의 생애를 알기 전에도 그랬고 알고 나서도 그의 글들이 사실은 아름답기보다 외롭고 슬프게 느껴진다면 내가 숲에 대한 그의 순수한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출판사(열림원)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yolimwon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