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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문예 인문클래식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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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은 필독서로 손꼽히는 도서 중 하나다. 이런 도서들은 무수히 많지만 살면서 이런 도서를 접하는 건 쉽지 않다.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좋은 책을 읽어볼 기회를 가졌다.

 

어렵다고 정평이 나있지만 사실 어려운 건 없다. 어렵다고 한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지 못하는 무지함에서 오는 막막함이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다만 이 클래식이 지금까지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는 이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봄 직하다.

 

우리는 비상계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아니, 살게 되었다. 우리는 공화국이지만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이런 국면을 맞이했다. 순식간에 군사 독재 시절로 회귀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이 있다. 애초에 보수당이 3분의 2 이상 의석을 가지게 되었다면 무슨 일이 펼쳐졌을까.

 

<군주론>에 따라서 만약을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대통령이 정말 정치를 잘 해서 민중을 위했고, 자신의 측근들에게 적절한 두려움을 주었으며 그들의 힘을 적절하게 억압했다면 어떠한 결과를 맞이했을까. 그땐 군주제가 됐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터무니없는 소리일까? 비상계엄 또한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군주론>은 단순히 500년 전의 이탈리아 사회에서만 적용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회사에서도 적용될 법한 문제다. 용병의 문제. 식민지의 문제. 원군의 문제. 민중의 문제 등. 집단에서는 모두 적용할 수 있는 문제다. 게다가 심리적인 문제가 포함된 아주 고차원적인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500년이 지난 세월의 우리들에게는 당시와 다른 인류애가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부분은 숙고해 볼 만하다. 특히 다음 대목이 그러하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보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해칠 때 덜 주저합니다. 사랑은 감사의 끈으로 유지되지만 사람은 저열해서 이익을 챙길 기회가 생기면 얼마든지 관계를 깨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의 공포로 유지되며 당신을 결코 저버리지 않습니다. (17)

 

오늘 뉴스에서 비상계엄 당일 탱크를 막은 시민의 영상을 보았다. 지금 우리는 두려움에 맞선 시대에 살고 있다. <군주론>은 인간 본성과 심리를 꿰뚫는 명서지만 우리 사회는 <군주론>을 다시 써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이번 문예출판사의 <군주론>은 당시 군주들의 초상화 등 그림이 실려있어서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훌륭한 군주라고 평가하지만 그토록 잔인하고 냉철한 인물들의 얼굴을 보니 오싹함까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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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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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1년생인 나는 어렸을 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수도 없이 들었다. 어렴풋하지만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도 몇 번이나 봤고, 주변에는 금강산을 다녀온 친구들도 꽤나 많다. 하지만 남북전쟁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었고, 연좌제나 빨갱이라는 단어는 영화나 소설에서 접했을 뿐이다. 그러다 문득 2017년 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시위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까지 갈라놓는 정치적 갈등이 분단 직후 상황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음을 실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비극적인 근현대사에 가장 깊숙하게 발을 디뎠던 것은 13년 전 군 복무 시절이다. 후방에 근무하던 나는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말 그대로 전역만 기다리던 병사였다. 그날도 무슨 유해를 찾겠다고 땡볕에 산에 올라 땅에 삽질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우리 부대에서 아무도 유해를 찾지 못했지만 한조였던 나와 맞선임은 유해를 두 구나 찾았다. 한 구는 완전 유해였다. 탄피에 만년필, 수첩까지 나왔다. 추후 영결식까지 거행됐다. 어쩌면 60여 년을 차가운 땅속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분도 누군가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문득 <유령의 시간>을 읽고 그날을 떠올려본다.

 

고작 15년을 아버지와 함께 했을 지형은 아버지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45년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이섭은 격동기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낸 인물이다. 아니, 이렇게 표현하는 건 실례다. 어떤 언어로도 이섭이 살아온 세월을 표현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형은, 혹은 작가 김이정은 이섭의 삶을 글로 써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것이 오빠 지석과 한 약속 때문인지, 딸로서의 도리인지, 혹은 작가로서의 사명인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해야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느껴졌던 많은 감정들 중 부끄러움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한테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이섭은 말한다. “인간의 생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하물며 이념과 꿈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지 않는 생은 또 얼마나 헛될 것인가

 

이섭의 삶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치열했다. 어쩌면 얼굴에 침을 뱉은 운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삶은 달라졌을까. 숙부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면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인생이 헛된 것처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부질없다. 다만 그는 숙부의 영향을 받았고, 운식을 만났다. 그 삶 속에서 그는 치열하게 살아갔다. 이념을 가지고 꿈을 꿨으며 꿈이 박살 났을 때도 인간을 믿고 살아갔다. 진과 아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렸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미자를 호적에 올렸다. 모든 걸 잊기로 다짐했지만 남북의 상황이 좋아지니 실낱같은 희망을 다시금 품었다. 그는 끝내 떠났지만 진과 지용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지형이 듣는다.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 결말이었다고 하면 너무 싱거울까. 하지만 나는 지형이 지용에게 편지를 쓴 대목에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결말은 단순한 판타지라고 치부해선 안 되는 무언가가 담겨있다. 매일 같이 양조장에서 하염없이 진과 아이들을 기다리던 이섭의 시간이 담겨있고, 가족들의 생사를 모르는 채 떨어져 있는 이산가족들의 현재가 담겨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비극적 근현대사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담겨있다.


이제 어린아이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랫말을 모른다. 심지어 대학생인 친구들을 만나봐도 북한과의 통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부표처럼 쓸려왔을까라고 생각한 이섭처럼 어쩌다가 이 나라는 이지경까지 왔을까 생각해본다. 무수히 많은 유령들이 한반도를 떠다니고 있다. 이제 어떡할 것인가. 도착하지 못한 편지는 반송될 것이다. 이제 곧 우리는 반송료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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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23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시전설의 모든 것
얀 해럴드 브룬반드 지음, 박중서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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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책을 제공받고 쓴 글입니다.


오래된 습관 중 하나는 온라인 서점 사이트 서핑이다. 이 책이 신간 목록에 떳을 때 자연스럽게 보관함에 옮겨두었다. 이유는 하나다. 이야기를 쓰는 입장에서 이런 책들은 아이템 서치에 유용하기 때문. 하지만 가격이 가격인지라 쉽게 결제를 하지 못할 때 서평 이벤트가 열렸고, 응모해서 당첨됐다.


두께에 비해 책은 술술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려운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짤막한 이야기가 묶여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도시전설이라니. 언제 어디에서나 돌고 도는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라니. 이런 이야기들엔 보통 욕망이 서려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비오는 날 멈춰선 차량에 커플이 타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남자는 잠시 차에서 내려 용변을 보러 갔다. 돌아오지 않는 남자친구를 걱정하고 있는 여자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차에서 내린다. 그런 뒤 발견한 남자의 시체는 차량 위에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이 사건의 범인은 인디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 책에서 발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읽었었고, 어딘가에서 들었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일부러 책을 펼치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서 적었다. 변형되는 이야기엔 변화하는 욕망 또한 깃들테니. 여하간 인디언에 대한 혐오와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게다가 미국에서는 차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지역과 문화까지 아주 짤막한 이야기에 스며들어있다. 결국 핵심은 우리 사회의 욕망이다. 불과 몇년전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무렵 국내에서는 난민들이 그들의 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뉴스가 퍼졌다. 물론 일부 사실을 기초로한 가짜 뉴스다. 우리나라의 의료 보험 혜택을 외국인이 전부 가져가고 있다는 뉴스도 많이 퍼져있다. 물론 일부 사실을 기초로한 가짜 뉴스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퍼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욕망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활과 아주 비슷한 사례들도 많다. 첫 이야기는 에어컨이 고장난 교실에서 시험을 치루던 학생이 창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선생님이 달려들어 막았다는 이야기다. 선생님은 어려운 시험에 학생이 자살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던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든다. 또 강아지에 관련된 이야기는 분명 어딘가에서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집에 돌아온 새댁이 죽어있는 갓난 아이를 보고 경악한다. 키우던 강아지 입 주변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결국 강아지를 죽인다. 하지만 집을 둘러본 결과 도둑이 들었던 것이었다. 도둑과 싸우던 강아지를 죽인 주인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다. 강아지 관련 이야기는 대부분 강아지는 의로운 동물이고,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내용들로 가득 차있다. 이 또한 우리가 강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각각의 이야기에 주석을 달아 놓는다. 내게 큰 도움이 되었던 주석은 각 사례들이 어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에서 변형해서 쓰고 있는지를 알려준 것이다. 각 이야기들을 찾아보진 못했지만 열심히 적어뒀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들은 참조해볼 필요성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흥미롭게 봤던 이야기들을 따로 적어뒀다. 책의 저자는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고 서술했지만 오히려 난 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재밌었다. 미국에서 많이 퍼져있는 자동차 테마는 문화가 살짝 빗겨간 느낌이 있고, 동물과 관련된 일화들은 개인적 취향과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성과 관련된 이야기는 만국 공통이니 오히려 더 재미를 느꼈다. 


꼭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이 아니어도 평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재밌게 볼만한 책이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짤막한 분량으로 정리해준 저자가 고맙기도 하다. 최근의 경향보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일파만파 퍼진 이야기들이지만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들이 많다. 마치 동화를 보며 교훈을 느끼는 것처럼 이 책을 보면서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 들여다보는 것도 이 책의 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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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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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표지가 너무 예뻤다. 읽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읽을 책이 산더미였다. 표지에 이끌려 클릭했을 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것도 아닌 로버트 레드포드란 이름이었다. 의아한 이름.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혹은 <보통 사람들>의 감독, 혹은 <흐르는 강물처럼>의 감독, 혹은 그 유명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의 기자 밥 우드워드, 그 로버트 레드포드였다. 제임스 설터는 그에게 영화 시나리오로 이 이야기를 제안했다고 한다. 내가 이 부분에 끌렸던 이유는 내 꿈이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문학이, 웹툰이, 때때로는 시가 영화로 옮겨지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렇게 집어든 책은 처음부터 미국 소설이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캘리포니아의 빛을 그린다. 난 캘리포니아의 빛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션 베이커의 영화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에서 수없이 캘리포니아를 봤다. 누군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그 분위기를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이건 제임스 설터의 재능이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카프카의 소설에서는 미지의 세계가 느껴진다. 카프카의 문체에서는 적어도 난 프라하의 공간을 느끼지 못한다. 미지의 세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는 빼쩨르부르그가 느껴진다. 하지만 난 빼쩨르부르그를 가본 적도 없고 거의 그 지역을 느껴보지도 못했다. 그냥 책을 읽다보면 마치 내가 상상하고 있는 공간이 빼쩨르부르그라는 감각만 남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건 감각이다.

 

<고독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대면하는 것은 내리쬐는 햇빛, 물론 강렬하면서도 때때로는 부드럽게 퍼지는, 물안개가 섞인, 그런 햇빛이 교회 지붕에 있는 노동자들을 비치고 있는 이상하리만치 나른하면서도 고통스러운 괴리감이다. 이 괴리감이 느껴지는 까닭은 내가 지붕 위에서 강렬한 태양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일 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떠올려보면 나른할 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익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괴리감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것이 기시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하지만 중요한 무대는 드뤼이다. 캘리포니아가 느껴지는 문체는 여전한데 장소는 프랑스로 변했고, 마치 이 문체가 묘사하는 드뤼를 포함한 산들과 풍경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장소에 도착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느낌이 마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주인공 랜드의 감각과 닮아있는데 이러한 기시감이 사라지는 순간들은 랜드가 등반을 할 때다. 그때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공간에 낯선 모습으로 들어온 랜드보다는 랜드의 눈 앞에 보이는 산의 아주 작은 일부분과 랜드의 행동만이 머릿속에서 그려질 뿐이다. 그래서 독자들에게는 괴리감에서 기시감으로, 기시감에서 안정감으로 옮겨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이것의 입체감은 동시에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장소에서 낯선 장소로, 낯선 장소에서 위험한 장소로 옮겨가는 이상한 모순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제임스 설터는 이러한 부분이 영화라는 매체와 이 이야기가 어울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는 그것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소설은 이미지를 그리게 만드는 것이기에 공간을 이동하면서 랜드의 감정이 점점 안정감을 찾는다는 것을 얼굴(face)로 보여줄 수 없다. 하지만 영화는 제작되지 않았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제임스 설터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그 이유를 주인공이 너무 과묵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글쎄. 영화감독들의 인터뷰를 믿지 말라는 평론가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생각할 때는 랜드가 과묵해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를 시각화시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랜드가 과묵하다고 하더라도 랜드의 심리상태는 소설에서(물론 시나리오는 읽어보지 않아서 모른다) 충실히 묘사된다. 예를 들어 랜드의 꿈이 소설 전반에 걸쳐 몇 번 묘사되는데 맨 처음 묘사되는 꿈인 챕터 10에서 정확하게 꿈을 충족하는 꿈이라는 문장을 사용한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묘사하는 꿈이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려왔다라는 것을 명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뒤에 나오는 꿈은 랜드의 소망이다. 지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꿈은 당연히도 챕터 20에서 나오는 캐벗이 죽는 꿈이다. 랜드는 캐벗의 죽음을 소망했다. 이유는 무엇인가. 챕터 18에서 캐벗의 등반에서 랜드는 제외됐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과묵한 주인공은 영화로 찍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묵한 인물을 찍은 영화감독들은 수도 없이 많다. 문득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이거 빙벽>이 떠오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1975년에 찍은 <아이거 빙벽>은 스위스 알프스를 등반하는 첩보 요원에 관한 이야기다. <고독한 얼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영화 역사상 등반 장면 중 가장 리얼하고 세심하게 찍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등반 장면을 찍다가 한 명의 스태프가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 출간된 것이 1979년이니 제임스 설터가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시나리오를 건넨 건 1970년대 중반으로 추정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이거 빙벽>은 단순 첩보 스릴러물이다. 하지만 <고독한 얼굴>은 등반 장면 자체가 삶의 투쟁처럼 보여야 한다.

 

그곳에는 도시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돈과 소유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결코 거세될 수 없는 남성성이 있다. 이것을 위해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바친다. (p.174)

 

랜드를 포함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것을 보고 오드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드리의 남편 브레이는 목숨을 잃고, 캐벗은 하반신을 잃는다. 하반신을 잃는다는 것과 남성성을 잃는다는 것의 동질감을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산의 의미는 더 다의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는 산에 대한 욕망에 가장 강렬한 애착(내가 생각했을 때는 집착이 아니다)을 보인 것은 당연코 랜드다.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른다고 하여 모두가 다 순수한 애착으로 인해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브레이의 친구 데니스 하트는 이탈리아인들을 구하러 갈 때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건 정말 내려가고 싶다는 뜻이다. 하지만 랜드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물론 데니스 하트도 같이 올라간다. 랜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캐벗의 경우도 애착이라기 보다는 거기에는 랜드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이 묻어있다. 오로지 랜드만이 산 그 자체를 사랑해서 오른다. 우리는 산을 정복했을 때의 어떤 정복감, 승리감 혹은 도취 등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냥 감격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퉁친다. 보통의 이야기 꾼들은 이런 순간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 순간 독자들 혹은 관객들의 감정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다가 멈췄다. 이렇게 퉁친다라는 것은 작가가 결코 산을 성공적으로 오르는 것에 인물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이 순간까지 이야기를 잘못 따라왔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멈춘 다음 앞의 이야기들을 복기한 뒤 다시 읽었다.

 

랜드의 욕망은 무엇일까. 산에 오르는 것이었다면 산 정상에서 끝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는 산이 아니라 캐벗의 집이다. 그리고 랜드는 캐벗을 일으켜 세웠다. 작가는 이 순간 또한 퉁치고 넘어간다. 캐벗은 소파에 앉아있었고 휠체어는 비어있었다는 식으로. 랜드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순간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투쟁 자체가 중요한 인간이다. 문득 나따위를 랜드와 비교해본다. 나는 왜 영화를 찍고 싶어하는가라는 질문. 영화가 좋아서? 혹은 좋은 영화를 찍고 싶어서?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순간 내가 영화를 찍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영화를 찍고 싶은 수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는 분명하게 인정투쟁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러나 그들은 랜드에 대해 얘기했다. 랜드가 항상 원해온 것이었다. 그의 업적을 능가하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비범한 인물은 계속 살아남는다. 이윽고 어느 때에 이르러 그들은 그의 소식을 제대로 알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랜드는 어떻게든 성공했다. 커다란 상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사라졌다. (p.272)

 

그렇다고 랜드의 욕망을 인정투쟁에만 두는 것은 아니다. 랜드는 드뤼를 정복했고, 이탈리아 인들을 구조했으며, 캐벗을 일으켜세웠다. 그 순간들은 항상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랜드를 덮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랜드는 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 속에 스며든 죽음 또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짜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더 이상 산을 오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풍기는 마지막 챕터에서 랜드는 더 이상 랜드가 아니라 라고만 묘사된다. 새로운 여자를 만난 그. 그는 이번에는 가정을 꾸리거나 연인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제 2의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고, 새로운 욕망을 투쟁하기에 충분히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생각하는 랜드라는 인물은 영화로 표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그 욕망이 얽히고섥혀 있다. 아마도 랜드라는 인물을 표현하려면 적어도 존 포드가 살아 돌아와야 할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고독한 얼굴>을 훌륭한 영화로 찍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거인을 다루는 소설을 만났을 때 어떤 영화감독들은 거절하기도 한다. 나는 그 거절이 일종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레드포드의 훌륭한 영화로 만났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의 제임스 설터의 <고독한 얼굴>을 지지한다. 가끔은 영화 연출 지망생인 나같은 독자조차도 랜드의 얼굴을 배우의 얼굴로 그리고 싶지 않다. 나에게 랜드는 껍질같은 단단한 피부와 매섭지만 동시에 애정어린 눈빛, 얼굴을 다 뒤덮고 있을만한 수염, 두터운 입술과 제멋대로 생긴 뭉뚝한 코를 가지고 있는 오롯이 나만의 인물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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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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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휴학했다. 영화 감독이 꿈인 나는 1년의 휴학 기간에 3학년 단편 영화 제작 워크숍에서 작품을 제작할 제작비가 필요했다. 제작비를 벌면서 경험을 쌓고 싶었다. 내가 생각한 방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호주 워킹홀리데이였다. 유학원에서 상담을 받으니 비용이 400-600만 원이 필요했다. 3-4개월 동안 두 개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 가능했다. 하지만 다른 방안 또한 고려했다. 영화 현장에 나가보는 것이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되돌아오는 사람들, 인종차별 관련 뉴스들을 접하고 부모님의 우려로 현장을 택했다. 연출이 꿈이어서 연출파트를 구하고 싶었지만 자리가 없었다. 조명팀과 미술팀의 경우 계속해서 구인글이 올라왔다. 결국 난 조명팀으로 첫 현장에 나가게 됐다. 그것이 지옥도로 진입하는 나의 첫걸음이었다.

 

2014년의 해는 영화 현장에서 처음으로 표준근로계약이 도입된 해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현장에 가지 못했고, 일명 통계약 방식으로 계약했다. 물론 난 어떤 계약서에도 서명한 적이 없다. 내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런 식이다. 조명 감독은 제작사와 계약을 한다. 조명팀은 조명 퍼스트(조명 감독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직급)가 통으로 계약한다. 당시 조명팀은 총 6. 6명의 인건비를 퍼스트가 챙긴다. 제작사에서는 크랭크 인 전에 계약금의 반을 주고 크랭크 업을 하면 잔금을 정산한다. 하지만 퍼스트는 우리에게 매달 월급으로 급여를 지급했다. 내가 있던 팀은 나름 투명한 팀이었고, 팀원 형들은 돈으로 장난질(책에서 나온 단어의 의미와 같다)치는 경험을 많이 봤기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다며 모든 급여를 공개했다. 나의 경우 문제는 외주(비유적으로)에 있지 않았다. 사실상 조명 퍼스트는 사업자를 낸 것도 아니니 외주로 볼 수는 없다. 문제는 원청에 있었다. 3월에 크랭크 인을 했고 3월은 촬영 일수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월급은 꼬박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 방식이 이미 절반의 임금을 지불받은 상태였으니. 하지만 문제는 4월부터 이어졌다. 거의 주 6일 동안 매일 20시간 이상 촬영을 했다. 그렇게 3월부터 8월까지 이어졌다. 하루 쉬는 날은 20시간을 잔 적도 있다. 촬영이 끝나면 장비를 정리해야 하는데 그 정리 시간만 하더라도 2시간 남짓이다. 우리는 하루에 2-3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많이 자는 날은 5시간 남짓. 대부분 쉬는 날 부족한 수면시간을 채웠다.

 

나는 이때부터 노동 인권에 관심이 많아졌다. 이렇게 일을 하면 신체에 변화가 생긴다. 내가 겪은 변화는 잔뇨와 무력감. 누군가는 혈뇨와 탈모, 그리고 흰 머리가 많아졌다. 무거운 짐을 들어야하는 일의 특성상 허리와 어깨 질병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중간착취의 지옥도>에 관심을 갖게된 건 나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작년쯤 어머니에게서 볼멘소리를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책에서 나온 원청 회사에 외주 업체에 근무한다. 외주 업체에서 지불한 월급을 다시 돌려받았다가 다시 아버지 통장으로 넣어준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사람 좋은 사람이다. 자신과 약속한 금액만 지불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외주 업체의 사장이 사람을 이용해 먹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든 회사가 그렇다며 불만을 갖지 않는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 아버지는 책에서 나온 60대 경비원 신태수씨와 같은 생각을 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할 때 아버지께서 이 책에 인터뷰를 했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다. 외주업체 사장은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부사수(?)라고 해야할까. 그런 부사수가 사업장을 내더니 중간에서 떼어먹고 사람이 다쳐도 별 관심이 없으니 어머니께서는 아니꼬울 수밖에 없다. 그 부사수는 사업장을 내고 2년도 되지 않아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한다.

 

내가 노동 문제에 가장 크게 관심이 있었던 시기는 2018년이다. 이때는 영화계에서 표준근로계약이 보편적으로 자리잡았던 시기다. 하지만 산업은 항상 변화한다. 난 언제나 일복이 많은 놈이라 표준근로계약이라는 것을 항상 비껴간다. 이때는 규모가 큰 드라마에서 조명팀을 했다. 이때 당시 난 근무표도 작성했다. 아직까지 내 핸드폰에 존재한다. 이 근무표에는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에 여의도로 집합을 한 뒤 지방으로 이동한다. 이동시간은 약 2시간. 새벽 6시가 넘어 도착하면 편의점 음식으로 허기를 대충 달래고 촬영에 임한다. 보통 끝나는 시간은 새벽 2-3시에서 5-6시다. 어떤 날은 정리까지 끝내니 오전 10시가 됐던 적도 있다. 그리고 다음 촬영이 없으면 서울로 올라오거나, 다음 촬영이 있으면 그 지역에서 잔다. 다음 촬영이 있으면 수면 시간은 대략 2-3시간. 드라마는 영화와는 다르게 일당으로 계산했다. 20시간을 넘게 촬영하고 내가 받은 돈은 17만 원. 당시 내 일당이다. 내 밑에 막내는 12-15만 원을 가져간다. 이때 내가 노동 문제에 관심이 커졌던 것은 뉴스 때문이다. 노동 시간을 주 52시간으로 제한한다는 소식이었다. 5일을 기준으로 하루 8시간을 일할 수 있고, 나머지 12시간은 적절하게 추가 근무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세부 내용까지 달달 외웠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의 드라마도 바뀌지 않았다. 2019년 여름을 마지막으로 조명팀을 관뒀다. 물론 내가 관둔 건 난 영화 감독이 꿈이기에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일을 찾았던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드라마 현장은 주 52시간 법망 바깥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2018년 당시 한 드라마 촬영팀이 죽었다. 제작사에서는 과로가 원인이 아니라고만 반복했다. 의료계에서는 과로를 원인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드물다고 말한다. 하지만 명백히 과로가 영향이 있었다. 내가 착잡한 것은 제작사의 주장이 아니다. 그 기사에는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다. 그리고 며칠 후 그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키스한 장면은 수없이 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사람의 죽음보다 이야기에서의 애정씬이 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런 세계다. 솔직히 책을 읽으면서 분노하고 대상없는 원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에서 유일하게 내 정신이 흐려졌던 부분은 노동의 댓가를 도둑맞은 100인의 이야기였다. 짤막한 글들은 내 분노와 원망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책을 덮고 잠시 후 다시 펼쳤다. 꼼꼼하게 읽었다. 이름 또한 건너뛰지 않았다. 단순한 사례 나열은 책의 본문에 비하면 내 감정을 자극하기에는 비슷한 사례들의 묶음이었지만 그 비슷한 사례들은 내가 겪었던 고통을 지금 감내하고 있는 분들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겪었던 고통의 분노는 나의 노동의 댓가를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법망을 피해서 이득을 남기려는 그들보다는, 부당함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그 사실과 부당함이 관행이 되는 것에 있었다.

 

드라마 현장에서 너무한 것이 아니냐고 소리치면 두 가지 반응이 온다. 투덜대지 말아라. 즉 투덜댈 거면 다른 일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고, 또 하나는 드라마는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도 책에서 나온 원청과 하청업체의 구조와 같다. 여기는 그 어떤 스펙도 없다. 다만 인맥과 경력만이 인정받는 세계다. 말 잘듣는 스탭을 쓰고 싶어하는 감독, 불만없는 스탭과 일하고 싶은 피디들이 모든 스태프 구성을 맡는다. 그러니 누가 불만이라도 터뜨리면 다음 작품 계약은 없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소리치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왜냐하면 조명팀을 계속할 것은 아니었고, 드라마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 아웃사이더였다. 그렇지만 이런 내가 눈치를 봤던 것은 조명 감독 때문이었다. 조명 감독은 계속해서 그들과 일을 해야하는데 조명팀인 내가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하면 문제가 됐다. 조명 감독은 2014년 내 첫 작품의 퍼스트였던 형이다. 그는 2017년 아이를 낳았다. 영화를 꿈꾸던 형은 드라마가 돈이 된다며 이제는 영화를 하지 않고 드라마를 한다.

 

나는 이런 일들을 겪으며 법이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됐다. “노동자를 위한 판결의 딜레마파트는 절망스러웠다. 법이 바뀌면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법 조차도 바꾸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챕터에 나오는 심현우씨는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마나 좋은 소리인가. 하지만 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2018년 여름은 폭염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여름 중 가장 잔인한 더위였다. 촬영 도중 한 명이 쓰러졌다. 포도당 한 알을 주고 그를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옮겼다. 하지만 촬영은 중단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촬영팀의 사망 사고 이후 촬영은 하루만 중단됐다고 들었다. 2018년에 같이 일하던 동생이 다쳤다. 심하게 다쳐서 한 달간 쉴 수밖에 없었다. 제작부에서 그를 병원에 데려갔다가 오는 길에 제작부원은 그에게 실비보험이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그 실비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물론 쉬는 시간 동안 급여는 지불되지 않았다. 원청은 그 어떤 책임도 없다. 하청업체 사장이 그의 병원비와 재해수당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하청업체 사장은 조명감독이다. 드라마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책임은 조명감독이 아니라 제작사에 있다고 한다. 책임은 떠밀린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그런 일정을 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런 문제들은 전부 지엽적일지도 모른다. 인터뷰하신 기자께서 급여를 물어보는 것이 어려웠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급여는 그 사람의 능력이고,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회라면 합법적으로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능력이고, 그 사람의 가치이다. 그렇다면 책에 나오는 외주업체의 중간착취는 그 업체 사장의 능력이고 가치이다. 돈이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다.

 

책을 읽으면서 분노와 한숨이 오갔지만 그 감정이 가장 격해지는 지점은 후반부 고용부의 답변이었다. 임금 직접 지급 제도는 책에서 언급된 것처럼 건설 현장에서 실시하고 있고, 영화 현장에서도 2015년부터 차츰 늘려가서 지금은 거의 모든 현장에서 실시한다. 하지만 드라마 현장에서는 실시하지 않고 있는 제도다. 고용부의 답변은 쌓인 분노를 터지게 만들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네크라소프의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난 조국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이토록 무기력함을 안겨주는 국가를. 고용부의 세 번째 답변에 표현된 경영상 비밀이라는 단어를 읽자 분노에 이어 헛웃음이 나왔다. 자본주의의 위험함을 경고한 수없이 많은 담론들은 이제 낡은 담론이 되었다. 사람보다 돈이 먼저인 것을 증명하듯 노동자의 권리보다 경영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단어.

 

고용부에게 면담을 요청한 대목에서 난 충격을 받았다. 거절의 이유로 무게감이 맞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읽었을 때 고민했다. 무슨 무게감을 뜻하는 것일까. 문제의 중요성이 면담을 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일까? 장관이 시간을 내기에는 너무 가벼운 문제라는 것일까? 기자들이 장관을 만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는 것일까? 혹은 낮은 계급의 사람이라는 것일까? 다시 케케묵은 담론이 떠오른다. 자본주의는 신계급주의 사회를 만들었다는 담론. 물론 무게감에 대한 내 해석이 빗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게감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은 무엇일까.

 

착실하게 일해서 평범하게 살아보려고 이 일을 택했어요. 보통 나이 서른 살이면 안정된 직장, 행복한 가정, 뭐 이런 걸 꿈꾸잖아요. 제가 엄청나게 큰 욕심을 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재영씨의 말에는 회한이 녹아 있었다. 서른을 앞두고 소박한 삶을 꿈꿨던 청년은 9년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재영씨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속앓이를 하는 사이, 어느덧 그의 30대는 끝나가고 있다. (p.110)

 

중간착취를 한 자들은 단순히 돈을 가져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뽐내며 살 것이다. 얼마전 LH사태가 터졌을 때 식당에서 밥을 먹던 아저씨들이 하는 대화가 떠오른다. “솔직히 저 자리에 있는데 누가 안 해먹겠어.”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고 난 뒤 어쩌면 우리는 지옥도에 이미 들어선 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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