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사소한 것들의 자리 - 그곳에 살아 있는 감각과 기억에 대하여
아키코 부시 지음, 박지영 옮김 / 멜라이트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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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사소한 것들의 자리

“또 알겠는가. 이처럼 사소한 결함이나 흠결이 우리에게 은총이 되어줄지도.”

프롤로그의 이 문장부터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키코 부시의 글은 덤덤한데도 이상하게 사람을 오래 붙잡아둔다. 작가는 그저 집과 사물, 기억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할 뿐인데, 읽는 사람은 어느새 자신의 오래된 감각과 기억들을 함께 들여다보게 된다.

이 책에는 집과 추억, 사물과 시간 사이를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이 담겨 있다. 패밀리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가족식사를 하다 문득 옆자리 가족이 완벽한 타인임을 깨닫는 순간, 동네 뒷산의 흑곰을 조심하라는 이웃의 쪽지를 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존재들을 떠올리는 장면들이 특히 인상 깊었다. 작고 사소한 풍경 속에서도 삶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짧은 글들이 이어지는 가벼운 분량의 책이지만, 페이지마다 공감과 질문, 긴 여운이 남는다. 읽는 내내 마음이 자꾸 간질거렸고, 때로는 울컥하면서도 오래 미소 짓게 되었다.

이번 책을 통해 아키코 부시는 다시 한번 평범한 일상을 낯설고도 다정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여름 바람 끝에 남아 있는 풍경소리처럼, 조용한 여운을 오래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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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하지만 깨지지 않는 - 어린이처럼 모든 순간을 사는 법
박상아 지음 / 부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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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하나를 들고 조용히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친다. 표지 날개에 적힌 문장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길게 호흡하고, 안미옥 시인의 따뜻한 서문으로 마음의 온도를 먼저 데운 뒤 읽기를 시작했다.

이 책은 초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학급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고도 포근하게 풀어낸 기록이다. 처음에는 어린이날이 있는 5월에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했지만, 읽고 나니 오히려 5월 15일 스승의 날에 더 가까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다. 방향도 속도도 아직 고정되지 않은 존재들이 오히려 나에게 배움을 건네는 존재로 다가왔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가 가진 고정된 시선과 판단을 여러 번 내려놓게 되었다. ‘어린이’라는 단어로 아이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 이해하는 대신, 일곱 살, 여덟 살, 아홉 살, 열 살… 각자의 나이와 삶의 결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들은 보호의 대상이기 이전에, 이미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었다.

이 책은 관계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우는 일이 어른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님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지속해야 할 태도라는 메시지가 오래 남는다.

읽고 나서, 나 역시 조금 더 유연하게 흔들리며 자라는 어른이고 싶어졌다. 좋은 책을 만나 감사했고, 아이들의 세계를 이렇게 깊이 있게 기록해준 박상아 선생님과 그 안의 수많은 어린이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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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시선 - 삶의 난제를 가볍게 풀어주는 속담 산책, 개정증보판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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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유난히 버겁게 느껴지는 날이면 나보다 앞서 길을 걸어간 어른의 목소리에 조용히 기대고 싶어지곤 합니다.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는 오강남 교수의 <오강남의 시선>은 그런 순간에 가만히 펼쳐 들기에 참 좋은 책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오랜 속담을 화두로 삼아, 그 위에 저자만의 깊고 따뜻한 통찰을 겹겹이 포개어 놓습니다. 단순히 옛말을 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대목에서는 속담의 이면을 뒤집어 보기도 하며,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새로운 해석을 덧붙여 우리에게 건넵니다.

특히 이 책은 2008년 처음 세상에 나온 뒤로 세 번의 개정을 거치며 오랜 시간 독자들과 함께 호흡해 왔습니다. 긴 세월을 견디며 다듬어진 시선이기에,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복잡한 고민들을 돌아보고 살피는 데 더없이 다정한 열쇠가 되어줍니다. 저자는 박식하고 깊은 지혜를 아주 쉽고 편안한 언어로 전하는데, 그 문장들 사이에는 삶과 살 속의 수많은 고통과 연민을 몸소 통과해낸 분만이 들려줄 수 있는 묵직한 울림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나긋나긋하게 들려주는 전래동화처럼 친근하게 다가오면서도, 그 안에는 인생의 막막함을 걷어내 주는 우아한 철학이 잔잔한 호수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마음이 어지러운 분들이라면 이 책이 건네는 쉽고 편안한 문장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책은 늘 우리를 한 뼘씩, 한 걸음씩 성장시킨다는 믿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저자의 시선을 빌려 잠시 뒤꿈치를 들고, 조금 더 높고 멀리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함께 만끽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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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사람을 위한 것
슬론 크로슬리 지음, 송섬별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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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제목 속 ‘Grief_슬픔’을 담당하게 된 ‘러셀’은 슬론의 첫 직장 상사였고 선배였고 동료였고 멘토이자 오랜 친구였다. 그리고 이 책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죽음을 마주한 슬론의 에세이다. 생의 끝을 스스로 선택한 러셀을 떠나보낸 깊은 상실감 속에서 쓰인 말들은 사람에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죽음 이후에 남는 상실의 감정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조용히 묻는다.

상실이라는 말 앞에서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타인을 ‘소유’한 적이 있었을까. 소유한 적 없는 존재를 ‘상실’했다는 말이 과연 성립할까.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애도와 슬픔뿐이지 않을까 싶다.

떠난 이를 지우는 숙제가 아니라, 곁에 있던 그를 내 마음속 안전한 자리로 옮겨 심어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로서의 ‘애도’. 남겨진 자가 가질 수 있는 애도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으려는 헛된 노력이 아니라, 물리적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그 존재를 내 삶의 내밀한 영역으로 새롭게 안착시키는 ‘관계의 재구성’ 아닐까.
누군가를 잃었다는 공허함에 아프다면, 당신은 그를 잃지 않았으며 단지 그와 연결되는 방식을 바꾸고 있을 뿐이라는 작고 작은 슬픈 응원을 건네고 싶다. 길고 긴 애도의 시간, 슬픔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일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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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후에도 축제는 벌어진다
와카타케 치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부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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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타케 치사코는 55세에 글쓰기를 시작해 63세에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데뷔한 늦깎이 작가다. 이 산문집 《인생의 오후에도 축제는 벌어진다》는 그런 그의 이력처럼, ‘나이 듦’ 이후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노년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거나 삶을 정리하는 방식의 에세이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목소리로,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시도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담담한 문장 속에 유머와 솔직함이 스며 있어, 무겁지 않게 읽히면서도 오래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늦게 시작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설교처럼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속도로 살아온 시간을 그대로 드러낼 뿐이고,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을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어떤 결론을 주기보다, 각자의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나이 듦이 막연하게 느껴질 때, 혹은 지금의 위치가 애매하게 느껴질 때 이 책은 조용한 방향 감각을 건넨다. 조급해하지 않으면서도 멈추지 않는 삶, 그 균형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산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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