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그건 언제나 한 명뿐이라고 지훈은 생각했다.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P 207

사랑의 단상 2014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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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의 존재는 물길이 있다는 신호다.
비록 그 물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필 그린우드 <반사>


화가가 사랑한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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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죽는다는 것은 더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 죽음이란 더이상 신간을 읽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더이상 읽지 못할 책들이 거기 켜켜이 쌓여 있었다.



지구의 나이 사십육억 년을 일 년으로 치면 한 달은 약 사억 년, 하루는 천삼백만 년, 한 시간은 오십오만 년이 된다. 그런 식으로 따져보면 공룡은 12월 11일에 나타나 16일에 사라졌고, 인류는 12월 31일 저녁 여덟시에 처음 등장해 열한시 삼십분이 되어서야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대문명은 자정 이 초 전에 시작됐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바얀자그에서 본 것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건 시간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부서진 돌처럼 흩어져 내린, 깊은 시간의 눈으로 보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공룡의 사체였다.



정미는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다. 분명 서로의 육체에 가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건만, 그리고 그때는 거기 정미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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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미시마야 시리즈 8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8월
평점 :
판매중지


“그럼 구메가와 강의 수신님은 물고기로군요.”
“아니, 물뱀이에요. 도련님, 뱀에게도 비늘이 있답니다



“태풍 때문일까요, 한가운데쯤에서 배가 흔들려서 무서웠어요.”
하고 오토비에게 말을 걸어왔다.
“마침 거기에서 수신님이 뒤척이신 거겠지요. 부럽네요, 부인께는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가슴 깊은 곳에서 지난 번 이야기꾼인 모치타로의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그것도 사람과 토지신의 유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모든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의 형태로 신의 가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 신을 모시고 우러르기 위해 독자적인 방식이나 규칙을 정하고 있다.



질냄비 각시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미야베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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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미시마야 시리즈 8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8월
평점 :
판매중지


오두막집만 한 크기의 커다란 눈알이 타앙, 타앙 하고 가볍게 튀어오르면서 계단 끝의 복도를 나아간다.
눈알은 하나인데 눈동자는 잔뜩 있다. 갓 찐 경단에 깨를 뿌린 것처럼 커다란 눈알은 눈동자투성이다.
그 눈동자들이 깜박깜박 깜박인다. 저쪽을 보았다 이쪽을 보았다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작은 새의 지저귐처럼.

“오늘 아침에는 눈의 신이 특히 목욕을 오래 하셨어요. 그 신은 어쨌거나 만사에 느긋한 분이시라 나도 가끔 당황할 때가 있지만……. 모치타로 씨도 마주치고 말았나요.”
/눈의 신


“이번에는 어떤 모습의 신을 보셨나요?”
“새까맣고 커다란 지네였어…….”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커다란 지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상인의 수호신이에요. 외상값을 받을 때 미처 받지 못하는 돈이 없도록 지켜 주시지요.”
/상인의 수호신


“나이 든 스님의 모습인데 머리만 빙글 뒤를 향하고 있었어!”
“후난後難을 막아 주는 신이에요. 뒤에서 닥쳐오는 모든 재난을 막아 주시지요.”
/후난을 막아 주는 신


“귀여운 목소리로 ‘금실 은실 주렁주렁 옥이 달린 보물상자’라고 지저귀는 작은 새를 봤는데…….”
“날개는 무슨 색이었나요?”
“눈부신 금색! 큰방의 교창 맞은편에 쌍으로 앉아 있었어. 내 기를 느끼고 날아가 버렸지만.”
“그건 복권의 신이에요.
/복권의 신


여관 복도 안쪽에서 먼지 냄새 나는 바람이 부웅~ 하고 불어왔다.

“빗자루의 신이에요. 까다롭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신이라 모치타로 씨의 재채기가 거슬리신 게지요.”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의 목소리였던 걸까.”
“모치타로 씨, 이 세상에 대체 얼마나 많은 수의 빗자루가 있을 것 같나요?”
“아, 그런가.”
/빗자루의 신


포창신은 약간 몸을 굽혀 거대한 머리와 어깨를 마을에 가까이 했다.
“그러자 제게도 보였습니다.”
최강이며 가장 흉악한 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망자였습니다. 야윈 알몸의 망자 떼가 서로 얽히고 겹쳐 거인의 모습을 이루고 있더군요.”
그리고 지옥불에 휩싸여 있다. 저녁 하늘 전체도 떨리게 하는 구웅구웅 하는 소리는 포창신의 몸을 태우는 불꽃의 소리만이 아니었다. 망자 떼가 저마다 울부짖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거인의 얼굴에는 눈과 코가 없고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러니까 해골이지요. 텅 빈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모두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포창신


매번 놀라고 무서운 일이 더 많지만 가끔은 기쁘고 즐거운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모습이 공포스럽긴 하지만 실은 고마운 수호신이나 복의 신인 경우도 적지 않다. 사람을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처럼, 신 또한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다.


주사위와 등에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미야베 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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