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로버트 앨린슨 지음, 김경희 옮김 / 그린비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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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중국에서 다시 '중국철학의 합법성'이라는 문제가 토론되기도 하였고, 그 결과로 중국철학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하는 논의의 결과도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서양의 중국(철학)학에서 교과서!!처럼 언급되고 있는 두 권짜리 펑유란의 중국철학사 서문을 보면 거의 1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중국철학사'라는 학과는 주로 '서양철학'의 틀로 중국의 고전을 裁斷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후스의 '중국철학사대강'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에 견줄 수 있는 사상으로 장자를 다루고 있다.

앨리슨의 이 책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요컨대 서양(앨리슨 자신의 논리) 인식론의 틀로 장자를 다루었기 때문에 중국의 고전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 오독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앨리슨은 이 책에서 주로 '성인의 꿈'과 '나비의 꿈'에 내재된 우언의 의미를 통해서 자신의 논리(서양의 논리)인 저급에서 고급으로, 갓난아기에서 성인으로 전화한다는 '영혼의 전화'를 논증하려고 장자 원문을 자기 멋대로 재구성하였다. 앨리슨의 시도한 '꿈'의 분석은 전적으로 서양의 관점(프로이드의 꿈의 분석처럼)을 차용한 것인데, 과연 장자 혹은 한자에서 '夢'이라는 글자가 영어 dream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장자 텍스트에서 말한 '꿈'의 원형은 '인류학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지? 어원학적인 의미에서 볼 때도 夢이라는 글자는 단순히 서양적 의미에서의 dream과 같은 것은 아니다. '설문해자'의 설명에 따르면 '몽'은 허구적인 것이 아닌 '不明'이므로 앨리슨의 '꿈'이라는 분석 자체가 기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아닌지?? 흔히 '나비'로 번역되는 한 장자가 말한 '호접'과 앨리슨이 말한 '호접'은 완전히 똑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지 중국 고전, 예컨대 崔豹의 古今注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한번 깊이 고찰해봐야 하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것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전화'로 앨리슨이 제시하고 있는 '호접'의 의미는 결국 자신의 '영혼의 전화'라는 논리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되었는데, 이것이 과연 장자가 말한 '호접'의 의미일까?

고전 해석에서 은유를 해석할 때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 결코 자신이 이해한 현재의 논리로 고전을 제멋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 특히 원문 텍스트를 자신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자신이 이해한 논리(이러한 이해가 과연 정확한 것인지는 막론하고)에 따라 원문을 재배치하는 일은 원문이 드러내고자 한 사상을 자기 멋대로 곡해할 수 있는 길이지 않겠는가??

앨리슨의 이 책은 바로 자신이 이해한 '꿈'의 논리로 장자 원문을 재배치하여 자신의 논리에 맞게 장자 사상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국내 출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전 다시 쓰기/읽기라고 할 수 있는 '리라이팅'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앨리슨이 현대철학의 인식론과 논리로 장자 원문을 改簒하고 단락의 순서를 재배치하여 장자의 '夢'에 드러난 은유를 저자 자신의 '인식론'에 부합되도록 만든 것은 장자의 아름다운 문장과 무한한 상상력과 풍부한 해석의 공간을 앨리슨 자신의 논리에 따라 거세시킨 것이리고 할 수 있다. 한미디로 말해서 장자에 함축된 사상이 서양의 '인식론'으로 해석된 중국판 변종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장자는 앨리슨이 이해한 논리에 따른 희생양이 되었다.

은유로 드러난 사상을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무한한 헤석의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무한한 해석의 함정에 빠지도록 만들기도 한다. 앨리슨은 바로 이 해석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고전을 다시 읽고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전을 다시 읽는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사유와 사상과 지식을 다시 되돌아 보게 만드는 거울과 같은 것이 아니라면 왜 지금 다시 고전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한가하게 고전이나 뒤적거리는 대신에 ......하는 법이라는 실용서를 읽고 현재의 삶을 도모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인류에게 남겨진 수많은 고전들을 지금 이곳에서 다시 읽고 쓴다는 것은 지난 선현들의 지혜로 돌아가 새로운 정신적 자원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전 본래의 텍스트로 돌아가서 살펴보는 일이 우선해야만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해야할 일은 무겁고 길은 멀지만, 이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 능력있는!! 학자들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출판사의 철학도 이에 부응해야만 하는 것이겠지만...........

(인문학)위기가 나타나는 영역에서 선현들의 지혜를 다시 생각해 보고 거기에서 새로운 자원을 흡수할 수 없다면 굳이 고전을 뒤적거릴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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