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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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전인 1965년 12월 20일,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우파로 몰려 고난을 치렀던 니에깐누 선생은 가오루에게 보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고이래로 여실하게 장자를 주석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 뿐만 아니라 중국 현대의 석학이었던 첸중수 선생 또한 '用管窺天, 用錐指地'(장자/추수편)라고 명명한 자신의 <<관추편>>에서 중국의 중요한 고전들에는 주석을 하였지만 <<장자>>에 대해서만은 오히려 시종일관 '默存'하여 <<장자>>를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주석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당시의 대문호였던 도연명이나 소동파 또한 <<장자>>에 대해서는 감히 쉽사리 해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러한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과연 그들의 학문이 부실하거나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일까? 장자 사후로 지금까지 그 책 <<장자>>을 주석한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국내에서도 장자 원문을 번역한 책이거나 해설/설명한 책도 부지기수이다. 이 책 또한 그러한 범주에 들어선다고 볼 수 있다. 강신주의 이 책에서는 과감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장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산의 정상부로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려고 한다.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저자가 취한 방식은 바로 '붓대롱을 통한 장자 읽기'라고 할 수 있는 '심득'의 방식이다. 마치 저자 자신이 연말이면 올라간다고 하는 소백산에서 휘몰아치는 겨울 바람을 온 몸으로 만나는 것처럼 장자 읽기를 시도하였고, 그 결과물을 이렇게 내놓았다.

저자는 '책을 시작하며'에서 "장자철학이 지닌 혁명성을 은폐하려는 무의식적인 저항'(법가적/황로학적으로 이해한 노자의 틀이나 '보론'에서 언급한 즉 "따라서 통용되는 33편의 곽상 판본은 선집임에도 불구하고 내편 7편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곽상 당시에 아직도 이 고본 장자와 최소한 세 종류의 선집본 장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곽상)가 함부로 자신이 선집한 장자에 자신의 글을 삽입했을 수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마치 곽상의 장자주석본이 현존하는 가장 믿을만한 텍스트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곽상의 주석본 자체를 의심해야만 한다. 여기서 그 세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왕필과 곽상(이들은 모두 노장을 주석한 유가학자였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학술적 상황의 긴장 관계..잘못하면 죽음올 내몰릴 수도 있었다...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바로 국내에서 번역된 장자 텍스트들을 원초적으로 다시 검토해야 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 학자들의 임무이다. 비록 지난한 일이겠지만)에 저항하여야만 하는 이유를 "망각과 연대의 실천, 한마디로 말해서 소통이라고 하는 장자의 혁명적 사유를 드러내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1부, 장자와 철학, 2부, 해체와 망각의 논리 3부 삶의 강령과 연대의 모색이라고 하는 세 부분으로 저자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장자의 혁명적 사유를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독자를 안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니에깐누, 첸중수, 도연명, 소동파까지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책을 시작하며'에서 밝힌 장자의 혁명적 사유는..분명 장자의 사유는 혁명적이었다....또하나의 삶의 철학일 뿐이다..그것이 저자의 주장처럼 혁명적 사유라고 할지라도...심하게 말하자면 뜨겁게 자유를 사랑하고 전제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무수한 장자 애호가들처럼 융회관통할 수는 없었고...융회관통하기 위해서 저자는 자신의 풍부하고 다양한 독서경험을 이 책에 풀어놓았다. 매우 문학적인 필치로 이 책을 서술하였기 때문에 정말로 술술 잘 읽혔다. 단지 '우연히' 장자의 편린들을 만나서 사유했던...이러한 무용지용의 사유가 바로 철학의 특징이라고 하면서....것을 마치 '장자의 혁명적 사유'라고 주장했지만, 이것은 바로 기존의 장자 해석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형이상학적 '안심입명'에 지나지 않았다. 프롤로그와 1장에서 서술한 '대붕'과 메추라기의 대비적 설명을 통해 드러낸 저자의 문제으식은 바로 곽상이 장자철학을 주석하면서 말한 '自得'의 현대적 버전일 뿐이었다.

자 그렇다면 이 책에서나 또 다른 국내의 장자 책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았던....이러한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장자와 송나라의 관계를 좀더 1차 사료를 통해 살펴보자. 단순히 사마천이 언급한 장자의 경력 말고 직접 여씨춘추/음사편이나 사기/송세가를 읽어보자. 여기에서 언급되는 장자 당시의 송나라 왕 偃의 행태를 살펴보라.

송왕 언의 행태...언은 역사적으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폭군이었다....와 깨어있는 사람으로서의 장자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볼 때, 장자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우언, 치언, 중언들에 함축된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왜 장자는 이러한 형식으로밖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을까?

장자(내편)를 중심으로 先秦의 1차 사료에 대한 꼼꼼한 연구 토대 위에서만 저자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장자라는 텍스트 자체는 우리에게 해석학적 모험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지난한 시간을 요구하는 학자적 작업이다.

'장자,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모험을 즐겼다.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것처럼.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베버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왜 떠올랐을까?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시오

그린비는 주목할 만한/관심을 불러일으키는/다음 책이 뭐가 나올까 궁금해 하는 출판사다. 그러나 얘전에 이 시리즈 리라이팅의 첫권을 읽고서 매우  재미있게 실망하였다. 그들만의 리그처럼, 하나의 놀이로서 어찌 읽든간에 관심은 없지만, 과연 학문을 한다는 것이 놀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신진학자들의 부던한 노력에 쪽박을 던지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아닌것 같다는 느낌을 왜 지을 수 없을까? 그린비 정도되는 출판사라면.....그리고 그러한 코뮨 집단이라면..........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는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그렇다. 리라이팅하는 것은 바로 그 '천의 얼굴' 가운데 하나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본 모습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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