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렬한 책읽기 - 중국의 지성 한샤오궁의 문화읽기, 세계읽기
한소공 지음, 백지운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어쩌면  그곳에서도 꽃이 피고 새싹이 돋는 봄이라면 한샤오궁 선생께서는 당신이 하방을 당했던 후난의 궁벽한 시골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 밭갈이를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2006년 한샤오궁 선생께서 세상에 내놓은 산남수북이라는 책을 읽고서 받았던 그 느낌을 이번에도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이 책의 원서를 조금 조금 읽었던 때나, 이렇게 번역이 되어 또 다시 곱씹어 읽으면서 느끼는 선생의 안목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대담 부분을 먼저 읽고나서 각 부분을 읽으면서 느낀 선생의 글들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첫 구절(" 정신병이 증가하는 시대다)처럼 정신의 빛을 상실한 채 화려한 네온사인과 확자지껄한 소음 뿐인(특히 나는 지하철에서 이어폰으로 새어나오는 그 소리에 몸소리를 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굳이 그 음악을 듣고 싶다면 혼자서 조용히, 다른 사람의 귀를 방해하지 않고, 들었으면 하는 바람에. 하여 내가 그 자리를 피하고 만다) 이 도시에서 정신병이 걸리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책방 나들이를 한다. "마음 멀어지면 사는 곳도 자연 외진 곳이 된다"고 노래한 도연명처럼 네온사인과 소음뿐인 이 서울 한복판에서 외진 곳처럼 살 수 있는 유일한 공간(書房)을 창조하고자 했다. 서치들의 즐거움은 바로 이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자위하면서. 선생께서 2006년에 출간하신 그 책을 혹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21세의 도연명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어쩌면 궁벽한 후난 시골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시골의 촌것(결코 비하의 말이 아님을)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서 '소리없이 숨쉬는 당신의 모국어이자 영혼의 피'를 '마챠오 사전'이라는 소설에 형상화한 것이나, 혹자가 말하듯, 옛날에 하아난다오(해남도)에 유배를 왔던 소동파 이후 최고의 지식인이 이곳에 왔다고 평가한 것이나 국내에 소개된 위화, 쑤퉁이 혹 1급 작가라면 한샤오궁은 국보급 작가라고 평가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책 '열렬한 책읽기'를 읽게 될 독자들은 그 스스로 이러한 평가들에 맞장구를 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생께서 서문을 대신해서 쓴 글 '세모에 책을 버리다'에서 말한 것처럼 부지런히 책방 나들이를 하는 이 서치가 볼 때도, 눈길조차 가지 않는 책은 제외하더라도 한번 들춰볼 만한 책들은 넘쳐 나지만 읽을 만한 책이나 갖고 있을 만한(혹은 갖고 싶은)책은 잘 보이지 않는 점을 생각할 때, 거장다운 한샤오궁 선생의 이 책은 군말없이 늘 가까이서 아껴 애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 혼자만 그러할까? '책과 책 사이를 떠다니는 지식의 거품을 걷어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박한 헛소리로 떨어지지 않고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참된) 지식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 선생의 표현을 '세계-알퐁스 도데 알렉스 헤일리 헌팅턴을 읽는다-에서 절감한다. 한 단락을 읽어본다.

붙잡힌 쿤타는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지는 고문과 교수형의 위협 속에서도 결코 백인 고용주가 지어준 영어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계속될 질문을 남겼다. 그럴 가치가 있는가? 영어로는 존엄을 지킬 수 없었나? 영어 이름을 갖는 것이 목숨을 버릴 만큼 불행한 일이었나?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의 피는 정녕 헛되었던 것인가? 만약 그것이 우매한 우물 안 개구리의 비극적 자업자득에 불과하다면? 그가 받은 모든 형벌이 배부르고 등 따순 후대 사람들의 조롱거리에나 값할 것이라면? 미래의 사람들에게 그는 녹음테이프 하나의 가치를 지킨 것에 불과한가?

그러나 그런 문제-지금 이땅에서 명박이가 외치는 오륀지 정권을 생각할 때-귓가에 들려오는 한층 더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다.

"쿤타"

핏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쿤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