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 글로벌 시대, 치열했던 한중일 관계사 400년
오카모토 다카시 지음, 강진아 옮김 / 소와당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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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에 진출해오자 기존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동요되었다. 서구 열강들 사이에서 합의된 국제법이 기존의 동아시아 역내질서와 충돌하며 동아시아를 둘러싼 각축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에서 조선은 자주와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이는 팽창을 국가의 목표로 삼은,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실현하기에는 어려운 과제였다.


조선은 건국 때부터 명과는 종번관계를 일본과는 교린관계를 맺었다. ‘종번관계명을 군주와 아비인 종주국으로 숭앙하여 스스로 신하와 자식인 번속의 지위에머무르는 것을 의미하고, ‘교린관계는 대등한 국가 간의 화친을 의미한다. 일본도 아시카가 막부에서 중국과 감합무역을 전개하였고, 임진왜란을 거쳐 은을 중심으로 한 세력확장에 따라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조명()관계, 조일관계, 청일관계는 서구 열강이 국제법을 앞세워 동아시아에 들어왔을 때 변동이 일어나는데, 이 책은 근대 조선을 통해 본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변동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살펴본다. 서구 열강의 국제법이 동아시아에 들어왔을 때 충돌이 일어난 지점은 무엇이었을까? 그 충돌에서 각국은, 특히 조선은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청, 일본, 미국, 러시아, 영국까지 개입되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청은 국제법을 활용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규정함으로써 전통적인 종번관계를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던 반면, 일본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여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였다. 충돌은 이 지점, 즉 조선은 청의 속국인가 자주국인가하는 '조선의 지위' 문제를 두고서 일어났다.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조회문에 포함된 조선은 청의 속국으로 내정 외교는 조선의 자주이다라는 문구를 들며 자주국임을 주장하였다. 속국자주의 중간 영역에서 등장한 나라가 러시아였다. 이렇게 조선을 둘러싸고 세 나라가 세력균형을 이루자 부들러는 조선 중립화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중립화론은 조러밀약으로 물건너가고, 잠시간의 균형상태도 원세개의 청군 파병으로 무너지고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본은 무쓰 무네미쓰의 말처럼 권력 평균을 유지하고, 나아가 조선을 보호국화할 목적으로 개전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으로 규정하고 보호국화의 절차를 밟았으나 이는 삼국간섭과 이에 뒤이은 아관파천으로 좌절되었다. 조선을 둘러싼 상황은 이제 청일의 공동보호에서 러일의 공동보호로 바뀌었다. 한편, 조선은 이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청과 대등한 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을 선포, 나아가 러일의 균형상태를 법적으로 고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에게 있어서 세력균형은 어느 한 나라가 확장의 조짐을 보일 경우 더 큰 사건으로 나아가는 연쇄작용이 불가피한, 임시적인 상황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러시아가 의화단사건을 틈타 만주를 점령해 세력균형을 무너뜨렸을 때 일본은 영일동맹을 바탕으로 전쟁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변동으로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조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길은 군사력을 증대시키는 것도, 어느 한 나라에 기대는 것도 아닌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조선은 왜 세력균형을 유지시키지 못했나, 조선은 왜 부들러의 조선 중립화가 아니라 조러밀약을 선택했나, 조선 내부에서는 어떤 논의가 있었나.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19세기 후반 정치 외교사를 주로 서술한 김종학의 <흥선대원군 평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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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 문학으로 읽는 신약성서 비아 교양
카일 키퍼 지음, 김학철.이승호 옮김 / 비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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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중,

문학비평은 본문의 역사를 추적하는 전승의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본문을 최종적인 것으로 대하는데, 바로 이 전제가 기존의 역사비평의 한 부분으로만 있었던 성서에 관한 문학적 관심을 독립하게 하였다. 예를 들어, 본문 내부에 서로 모순된 것이 있다면 양식비평이나 편집비평, 전승사비평은 그 모순을 전승의 과정에서 오는 것으로 돌렸을 것이다. 그러면 모순의 문제는 ‘해소된다. 그러나 문학비평은 문학적 관점에서 그 모순을 ‘해결‘ 하려고 한다. 이전 비평들이 간략하게 넘어갔던 그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주어진 본문을 하나의 문학적 통일체로 대하는 문학비평은 본문의 섬세한 이해와 효과를 알려고 했다. 그러자 이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성서의 문학적 수준과 통일성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것을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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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 문학으로 읽는 신약성서 비아 교양
카일 키퍼 지음, 김학철.이승호 옮김 / 비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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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 19세기 성서학자들은 성서에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노력했다. 19세기 성서학자들, 특히 독일 학자들은 교리라는 틀로 성서를 읽는 경직된 관점을 벗어버리려 했는데, 그들은 자신을 ‘역사‘라는 현미경을 통해 신약을 연구하는 과학자로 여겼다. 그들은 성서 본문을 매우 신중하게 읽어 나갔고, 일종의 문학 비평literary citique접근도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본문과 독자 사이에 일어나는 심미적이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오래된 형태의 문학 비평을 통해 성서가 만들어진 세계를 알기 원했고, 그 세계에 관한 정보를 성서 본문에서 얻어내려 했다. 그들은 예수의 치유가 역사적 사건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예수에 관한 초대 교회의 주장을 반영할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 성서에 등장하는 기적 이야기와 일반 민담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기적 이야기가 예수보다는 그 이야기를 전달한 사람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 historical method은 더는 성서학의 주류가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성서학자들(특히 그들의 제자들은 이내 역사적 접근법이 독자와 성서를 떨어뜨려 놓고 있음을 깨달았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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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나라? - 친절하면서도 간결한 일본 근현대사
오구마 에이지 지음, 한철호 옮김 / 책과함께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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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도 이해할만한 수준에서 일본근현대사를 전전과 전후로 나누어 설명한 책, 전후 일본이 미국과 어떻게 얽혀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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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조약, 장사 - 청 제국주의와 조선, 1850-1910 역사 모노그래프 5
커크 W. 라슨 지음, 양휘웅 옮김 / 모노그래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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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일방적 희생자로 여겨졌던 청은 사실 비공식 제국으로서 조선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일본의 종주권 위협에 대응하여 청은 다자적 제국주의를 도입하여 청일전쟁 이후까지 일본의 도전을 견뎌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일방적 제국주의로 대체되었다.


19세기 청은 태평천국과 같은 민란, 경제 불황, 환경변화 등의 문제와 열강의 진출로 도전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기존에 널리 주장되었듯이 청이 단번에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되는 열강의 침입으로 인한 중국의 과분(瓜分)’이라는 내러티브와 조공 체제에 기반한 중화적 세계 질서라는 이미지는 19세기에도 여전히 청이 동아시아적 의미에서 제국주의 국가였다는 사실을 가려 왔다. 청의 조선 정책을 전통적인 관점을 제쳐두고 바라볼 때, ‘다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에 취했던 조치들과 여러모로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청은 영토의 직접적인 합병 없이상대국에게 온전한 주권국들 사이의 관계에서는 용인될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강압을 행사하는 비영토적(non-territorial), 비공식 제국으로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청의 종주권에 도전해왔을 때청은 모든 외부 세력에게 동등한 접근을 제공하는 다자적 제국주의질서를 조선에 도입하였다. 이 질서는 조약과 국제법, 그리고 상업을 중심으로 지탱되었다. 조선 정책을 주도한 이홍장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이 열강과 조약을 맺도록 유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도입된 다자적 제국주의는 조약에 근거하여 여러 열강을 동등하게 대하는 조선해관을 통하여 뒷받침되었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전근대적인 조선 정책이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았다고 여겼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컨대, 이홍장이 주도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서구 열강들의 여타 불평등 조약보다 더 나은 조건이었고, 원세개가 조선의 차관 도입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더 심한 침탈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조선이 해외에 공사관을 설립하려는 시도는 청이 아닌 알렌과 데니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고, 공사관 설립과는 별개로 고종은 여전히 전통적인 의례를 준수하였다.


비공식 제국청의 정책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측면은 상업이다. 청 상인들은 제국주의 정책의 협력자로서 조선에 들어와, 청이 구축해 놓은 제도적 틀 안에서 점차 일본 상인들을 제압해 나갔다. 청일전쟁 이후 다자적 제국주의 질서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은 이들이 조선 내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을 때, 삼국간섭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다자적 제국주의는 시효가 다 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을 내보내는 한편, 철도 건설, 화폐 개혁 등을 통해서 조선을 잠식해나갔다.


청은 비공식 제국으로서 조약, 국제법, 상업에 의해서 지탱되는 다자적 제국주의를 조선에 도입하여 기존의 종주권을 유지하였고, 이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일방적 제국주의로 대체되었다. 상업을 중심으로 유지된 청의 다자적 제국주의와 그 질서 속에서 조선(한국)의 모순적인 움직임은 기존의 청-조선 관계를 다시 보게 한다. 이는 더 나아가 제국주의의 시기, 제국과 식민국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제국주의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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