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수수께끼
존 던 지음, 강철웅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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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인민이 직접 통치하는 정치적 의사결정 방식(민주정)이자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이념(민주주의)-를 이해하려면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검토와 함께 오늘날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처음에는 정치적 의사결정 방식으로서 시작된 민주주의는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채 후대에 전달되었고,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이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20세기에 들어 보편적 제도이자 가치로 자리잡은 민주주의는 오늘날 대의제 틀 안에서 대중민주정으로 구현되고 있다.


민주주의로 인한 정치적 성공과 정치적 위기를 모두 겪은 아테나이는 자신들의 경험을 집약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를 후대에 넘겨주었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 플라톤의 <국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으로서 민주주의를 겪어 보지 않은 후대인들은 이 두 저작에 기대어 민주주의를 판단하였다. 플라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줌으로써 권위를 해체하고 그에 따라 공동체의 안정성을 훼손시킨다. 안정성이 사라진 공동체는 결국 참주정으로 귀결어버리니, 민주주의는 플라톤의 목표인 좋음의 본성에 어긋나는 정치체제로 규정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선개념에 따라 다수에 의한 정치체제를 폴리테이아와 데모크라티아로 구별한다. 이 둘 모두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면서도, 폴리테이아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반면 데모크리티아는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는 다수의 폭정이자 노골적인 집단 이익체제이다.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바로 데모크리티아였다.


미국 혁명 시기에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피해야 할 정치체제였다. 미국 혁명의 목표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대의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지 노골적인 집단 이익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프랑스 혁명 시기에 변화되었다. 민주주의는 점차 정치적 이념을 표현하는 용어로서 등장하게 되었고, 로베스피에르에 이르러서는 평등 질서로 대표되는 정치에 대한 전체적인 비전을 조직하는 관념으로서 의미가 확장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뒤를 이은 바뵈프와 평등파의 봉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민주주의에 결합된 평등에 대한 추구는 지속되었다. 대의제는 민주주의를 자신의 정치체제를 지칭하는 용어로 끌어다 씀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으로 삼았다. 인민의 직접 지배를 방지하고자 창출된 대의제 정부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실현시킨다고 주장하는 모순된 사태에 이른 것이다.


평등을 구현하고자 하였던 사회주의의 시도가 실패하였던 반면에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이 번영하면서 민주주의는 보편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너도 나도 민주주의를 자칭하는 상황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민주주의인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나, 대의제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인지, 대의제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치를 어느 정도나 구현하고 있는지 따져묻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은 선거와 정당이다. 인민은 선거를 통하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지도자를 교체하고, 지도자를 끌어내리기까지 할 수 있다. 지도자는 인민의 여론을 고려하여 정책을 집행하고 정당은 인민의 의사를 반영하여 선택지를 제시한다. 비록 대의제 민주주의가 바뵈프와 평등파의 민주주의와는 관련이 없었고, 정치적 정당성을 끌어내기 위한 기만으로서 시작되었지만, 투표권의 확산으로 도래한 대중민주정으로 인해 대의제 민주주의는 최소한이나마 인민의 의사를 반영하게끔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 곧 민주주의에 대한 사유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와 함께 전개되어왔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관한 탐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지, 어떤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인지와 같은 국가와 정치체제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시작으로 플라톤의 <국가>를 해설한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가 적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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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36
로베르트 미헬스 지음, 김학이 옮김 / 한길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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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 1876~1936)정당론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에 걸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민주적 정당의 과두화 과정을 다룬 연구서다. 그는 정당이 인민주권의 원칙을 추구하지만, 모든 정당은 관료화하고 결국 과두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가 1907년 이탈리아 사회당과 독일 사민당에서 탈당한 까닭은 바로 이것이며, 사회주의 정당이 1차대전 직전 본래의 국제적·혁명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조직 유지를 위한 기관(Organ)으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미헬스는 역사학을 전공하여 이탈리아 토리노대학에서 연구하였고 생디칼리슴에 경도되어 이탈리아 사회당, 밀라노 노동회의소, 독일 사민당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의 정당은 인민주권의 원칙’, 곧 절차로서의 민주정뿐만이 아니라 대중의 직접적 지배와 모든 개인이 동등한 자로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통로였다. 사회주의 운동도 사회주의 협동촌건설과 같이 실험적인 방식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변혁하고자 했던 기존의 방식에서 변화하여 정당을 조직하고 인민주권의 원칙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미헬스가 활동하였던 이탈리아 사회당은 생디칼리슴 경향이 강하였고, 독일 사민당은 페르디난트 라살이 조직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정당으로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헬스는 정당에 가입한 지 얼마 안 있어 독일 사민당과 이탈리아 사회당에서 탈당하는데, 그가 정당의 과두화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민주적 정당에서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를 지배하는과두정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본래 당원의 위임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는 자신의 카리스마와 연설 능력을 활용하여 자신을 선출한 당원을 지도·지배하고, 자신의 권한을 활용하여 정치적 경쟁자 및 반대자들을 억압한다. 한편, 당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다수의 당원들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서 관습적으로 지도자를 숭배하게 되니, 한 번 만들어진 지도자의 권력은 쉽게 방해받지 않는다. 게다가 정당의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정당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이는 정당의 관료화·전문화를 초래함으로써 마치 보나파르트주의와 유사하게 대중 의지의 집행 기관에 지나지 않았던 지도부가 대중으로부터 해방되어 독립된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르니 곧 민주적 정당의 과두화이다.


미헬스는 자신이 활동했던 사회주의 정당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사회주의 정당에서 과두정은 어떻게 나타나는지, 왜 사회주의 정당이 본래의 혁명적 성격을 잃게 되었는지, 1차대전 직전 사회주의 정당이 국제주의를 포기하고 국가에 동조하였던 것인지 설명한다. 정당이 확대되며 출현한 직업적 지도부는 다수 당원에 대해 지적인 우월성을 지니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어, 정당 내에 이들 직업적 지도부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적인 당원들 사이의 계급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더욱이 정당이 점차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고 확대됨으로써 사회주의 정당은 계급 정당에서 대중 정당으로 이행, 기존의 투쟁적 성격을 잃게 되고 국가 안의 기관(Organ)으로서 정당의 관습적 유지에 힘쓰게 된다. 결국 과두적인 직업적 지도부의 출현, 대중 정당으로의 성격 변화로 사회주의 정당은 고전적인 국제주의와 대비되는 작은 문고판 사회주의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민주적 정당은 조직의 확대에 따른 관료화, 지도자의 지배욕구, 대중의 무관심으로 인해 과두정으로 이행한다. 미헬스의 분석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으나, 나는 미헬스의 논지를 따라가며 민주주의 이념이 얼마나 현실에 실현시키기 어려운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존 던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를 출발점으로 민주주의에 대해서 되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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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배덕만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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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루이스 윌켄은 전작 <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에서 외부의 시선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탐구한 이후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에서 그리스·로마의 비평가들에 대한 그리스도교 내부의 반응과 그리스도교의 사유방식을 보여준다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당대의 철학을 활용하여 비평가들의 물음에 응답하면서도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반하여 독립적인 사상을 전개하였다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은 바로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로부터 시작하여 성경과 교회라는 또 다른 원천에 기반하여 그리스도교를 형성하였고나아가 헬레니즘을 기독교화하였다.


그리스·로마의 비평가들은 주로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 등 그리스도교가 피할 수 없는 물음들을 적절히 제시하였다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비평가들의 물음에 대응할 때 그리스·로마 철학을 활용하면서도동시에 그것과는 다른 토대 위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전개하였다두 사상의 토대가 서로 달랐음은 켈수스의 비평과 이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응답에서 두드러진다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익숙해 있던 켈수스에게 하나님은 육신에서 눈을 돌려 영혼을 올려보는 정신의 고양으로 볼 수 있지만오리게네스에게 하나님은 역사적 인물 속에서 내려오신 사건으로 알 수 있는 존재였다그리스·로마 철학이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점차 올라가 신을 인식한다면 그리스도교는 인간들을 향해 내려온 신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이 사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그리스·로마 철학자들에게는 의심의 대상이자 조롱거리였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증인들에 대한 신뢰로 이루어진 명백한 사실이었다.


에티엔 질송이 우리 자신과 그리스인들 사이에 기독교 계시가 끼어들었으며 이성의 작동을 위한 상황들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였듯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의 핵심이었다이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또 다른 원천인 성경에 기반하여 사상을 전개하였다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가 된 하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하였다특히 오리게네스는 알레고리라는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약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였다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을 지상에서 보여주는 그리스도교 사상의 또 다른 중심이었다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성경 해석과 저술은 교회를 염두에 두고 행해졌으며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예배에서 역사 속에서 계시된 사건들을 되풀이하며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축하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로마 비평가들의 물음에 응답하면서도 그리스·로마 사상 밖에서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그리스·로마 철학과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성경과 교회로 전개된 그리스도교는 그 목적에서도 당대의 철학과 구분되었다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에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에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아우구스티누스가 묘사한 하나님의 도성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즐기는” 곳이다. ‘지상의 도성에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거룩한 욕망을 품도록 격려하는 행위들교회가 그리스도교에 부여한 사회적 차원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핵심이었으며 헬레니즘을 기독교화하는 데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성경교회를 원천으로 형성되었고 헬레니즘을 기독교화하였다곧 그리스도교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목적으로 초월적 사건그것에 대한 사유와 교회라는 현실적 제도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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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의 형성 - 신경은 어떻게 신경이 되었는가? 비아 시선들
프랜시스 영 지음, 강성윤.민경찬 옮김 / 비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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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교회 안팎의 도전에 맞서며 신경을 형성하였다. 이 과정은 그리스·로마의 다신교와 유일신 신앙을 물려준 유대교 사이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명료화하는 과정이었다. 신경을 둘러싼 논쟁이 정통이단을 가르고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였음에도 불 구하고 계속되었던 이유는 그것이 교회와 신자들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프랜시스 영의 신경의 형성(The making of the Creeds, 1991)은 앨런 리처드슨의 신경의 형성(Creeds in the Making, 1935)의 속편으로 50여 년 사이에 이 주제에 관해 변화된 관점을 반영한 입문서이다. 앨런 리처드슨과 달리 프랜시스 영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과 분리된 사실을 찾고자 하지 않으며, 신경을 신앙에 관한 이차적설명으로 간주하지도 않는 다. 신경의 형성은 삼위 하느님에 대한 송영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예수, 부활을 이해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더 나아가 영지주의, 그리스·로마 종교와 같은 외부의 도전과 내부 이단에 맞서는 정치적 쟁투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공동체 내 권위자, 진리를 판단할 근거가 필요하다는 실재적 요구에 의해 정통의 시금석으로서의 신경을 형성해야 하였다.


교회가 처음 마주한 도전은 창조에 관한 것이었다. 물질세계를 격하시키며 성육신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물질세계가 2 원리질료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로마 철학에 비추어 그리스도교는 창조 교리를 가다듬어야 했다. ‘한 분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라는 신경의 첫 조항은 영지주의를 배격하고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를 고안함으로써 전능한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선한 세계를 변호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마주한 또 다른 도전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모두에게 예배하는 것”, 즉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였다. 그리스도교는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개념을 활용하였다. 유스티누스의 로고스 신학을 이어받아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중재자라고 변론하였고,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변을 거쳐 최종적으로 니케아 신경에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본질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로마의 다신교,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명료화하였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명료화되기까지의 과정, 그 중심에는 구원의 문제가 있었다. 당시 교회생활의 중심에는 구원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교회는 이 구원을 감지하고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어떻게 다자가 궁극적인 일자와 연결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한 분 하느님과 한 분 주님을 섬길 수 있는가’,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는가,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오는가’, 나아가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는가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신경은 이 세계를 거부하지 않고 하느님이 이 지상의 통치자가 되시며 그분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그리스도교의 구원론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신경의 첫 조항은 하느님께서 -창조혹은 회복시키실 이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었으며,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를 반박하였던 까닭은 로고스가 본질상 하느님의 아들이어야만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될 수 있도록 그분은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창조로서의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수해온 삼위 하느님에 대한 송영또는 고백은 그리스·로마의 종교와 이단과의 논쟁 속에서 정통의 시금석인 신경이 되었다. 프랜시스 영은 교회 안과 밖, 교회 내부 정통이단사이의 논쟁을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이 과정 전반에 신자들의 구원, ‘이 세계의 회복이 놓여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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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 - 로마 세계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 비아 제안들 시리즈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양세규 옮김 / 비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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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다신교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생활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이 로마 제국 체제를 위협하는 미신이라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교가 학파로 인식되면서 비로소 시작된 그리스·로마 지식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진지한 논쟁은 그리스도교가 로마 세계에 어떻게 비춰졌는지,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사상적·종교적 충돌 지점은 어디였는지 보여준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이들의 비판에 대응하며 논변을 마련하고 교리를 가다듬으며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형성해나갔다.


초창기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기록을 남긴 플리니우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는 공통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미신으로 이해하였다. ‘미신은 로마 세계 바깥에서 로마 세계 안으로 들어온 관행과 신앙으로서 로마 제국의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여겨졌다. 로마 제국에서 종교는 항상 시민종교로서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황제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체제 유지 기능과 연결되어 있었다. ‘팔레스티나에서 막 일어난 새 종교는 자신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공공의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민종교의 원칙에 어긋났던 것이다. ‘경건한로마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시민들로부터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종교 생활에서 등을 돌리게끔 하여 무신론으로 이끄는, 그 결과 로마 제국 체제를 위협하는 미신이었다.


2세기의 과학자갈레노스는 그리스도교를 미신이라는 틀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철학 학파로 이해한 인물이었다. 갈레노스를 시작으로 켈소스, 포르퓌르오스, 율리아누스와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의 논쟁이 이루어졌다. 핵심 쟁점은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였다.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은 그리스·로마의 사유방식에 따라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로마 전통에서의 최고 존재에 대한 숭배를 저해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교 역시 경건과 정의와 인류애를 고취한다고 변론해왔다. “가장 박식한 철학자포르퓌리오스는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이 유일한 최고 존재에 대한 숭배를 위협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켈소스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것이 곧 최고 존재에 대한 대항 신을 설정하는 행위이며, 이것은 또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그리스·로마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충돌은 정치적문제이기도 하였던 것이었다.


옛 신들에게 돌아선” ‘개종자율리아누스 황제가 시행한 조치들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조치였다. 그는 칙서를 발행하여 그리스·로마의 전통 종교를 가르치게 하였고 파괴된 유대교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리스도인에게 유대교 성전의 파괴는 그리스도교의 예언이 성취되었으며 유대교가 종결되었다는 증거였다. 비록 실패하였으나,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시기에 로마 제국의 체제 이념으로 확립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그리스·로마의 전통 종교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로마의 지식인들과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의 논쟁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관계, 예수의 위치,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 성서의 역사적 신뢰성과 같이 이후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핵심적인 주제가 될 문제들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논쟁을 계기로 새로운 교리가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니, 갈레노스의 비판에 응대하면서 만들어진 무로부터의 창조교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로마 종교가 제기하는 비판에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들이 필사적으로 대응한 과정은 그리스·로마의 사유방식이 그리스도교에 스며드는 모습,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그리스도교만의 역사로 볼 수 없는 이유이다. 후속 도서로는 로버트 루이스 윌켄과 유사한 관점에서 교리의 형성에 주목한 프랜시스 영의 <신경의 형성>이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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