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 속의 유령 암실문고
데리언 니 그리파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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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여성의 텍스트, 21세기에 쓰였다. 얼마나 늦었는지. 얼마나 많은 게 변했는지. 얼마나 변한 게 없는지.” (p.14)

21세기의 아일랜드 시인 데리언 니 그리파는 세 아이를 낳아 기르며 넷째 아이를 임신한 가정주부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연히 10대 시절 읽었던 시를 떠올린 그는 17세기의 시인 아일린 더브에게서 세 아이의 엄마이자 시인이라는 동질감을 느낀다.

아일린 더브는 단 한 편의 시 <아트 올리어리를 위한 애가>를 남겼는데 이 시에는 갑자기 살해당한 남편의 마지막 순간과 그를 향한 그리움, 남편을 살해한 자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데리언은 넷째를 출산하는 와중에 이 시를 번역하고 시인의 삶을 추적해나간다.

“나는 내가 아일린 더브의 작품에서 가장 소중하 게 여기는 요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오랜 시간을 두고 숙고했던 그 많은 방 안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요소는 텍스트 너머에서, 연과 연 사이의 공백에서, 번역할 수 없는 곳에서 맴돌았다. 그 공백에 난 계단 위에 서면 한 여자의 숨결을,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숨결을 느낄 수 있다.” (p.61)

남편이 말릴 정도로 아이를 좋아하여 네 아이를 낳은 어머니로서 데리언은 끊임 없이 출산과 모유 수유를 하며 자녀를 돌본다. 한편 시인으로서 가족 모두가 잠든 새벽에 시를 쓰고, 자신과 비슷한 시인인 아일린 더브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다.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데리언은 아일린이 살던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역사 속에 묻힌 시인에게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한다. 젖과 피, 잉크가 흐르며 두 여인을 이어준다. 집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이 여정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책에 담겨있다. 이것은 여성의 텍스트다.

•을유문화사(@eulyoo)에서 책을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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