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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모든 것의 시작은 우연이었다. 우연히 낭독회를 하기로 한 다른 저자가 약속을 취소하였고, 우연히도 피터의 책을 읽은 삭스가 그를 추천했고, 우연히도 낭독회날 폭설로 인해 낭독회는 취소되었지만 낭독회장소로 온 삭스와 피터가 만나 친구가 되었다. 우연히도 파티에서 마리아를 만났고, 아슬아슬하게 앉아있는 상태에서 우연히도 술에 취한 여자로 인해 건물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자신을 면회하러 매일같이 찾아온 마리아와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고, 책을 쓰기 위해 틀어박힌 곳에서 외출을 하다 우연히도 만난 사람의 차를 타고 가다 그의 죽음을 보게되었고, 결국 그로 인해 또 다른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벤저민 삭스는 작가에서 테러리스트로 변했고, 결국 폭탄에 의해 죽게 되었다.
모든 것이 우연이었고, 운명이었다. 만약 벤저민 삭스가 대녀의 선물을 사기위해, 산책을 하기 위해 나선 길에서 길을 헤매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가 히치하이킹을 하려했을 때 운전자가 차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만약 사람을 죽인 후 찾아간 집에서 패니가 다른 사람과 있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가 불현듯 릴리아의 집으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벤저민의 운명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로서의 삶을 살며, 가끔씩 다른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했겠지만, 패니와 언제나처럼 사랑을 하며, 대녀인 피터의 딸을 이뻐해주며 그렇게 살았을텐데.. 그의 운명은 우연에 의해, 그리고 우연에 가려져 존재감이 희박하지만 그의 선택에 의해 그렇게도 복잡하게 결정되었다.
어느 누구나가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는 없고, 어느 누구나가 운명과 우연의 장난에 의해 여러가지 일을 겪지만, 삭스는 그 누구보다도 더 운명의 손아귀아래에서, 우연의 장난에 의해, 거기다 다른 선택을 하였으면 좋았을텐데라는 후회를 남긴 자신의 선택에 의해 복잡하고,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고, 자신이 알았던 사람들에게 때론 잔인하게, 때론 조용히 이별을 한 뒤 굴곡진 그의 삶을 마감했다.
우연이라는 거대한 괴물에 집어삼켜진 벤저민 삭스.. 아니 어쩌면 우연이라는 거대한 괴물에 집어삼켜지기 전에 자신의 마지막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삶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었는지 아니면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는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나라면 하지 않았을 그런 결정이었고, 우연에 의해 결정된 우연이라면 정말이지 운명의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런 그의 마지막 모습일 뿐이다.
과연 벤저민 삭스는 우연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결정된 그의 삶을 무기력하게 따라간 것일까, 아니면 우연에 의해 결정되어지려는 삶에서 벗어나려 노력을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