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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보통은 안그러는데.. 이 책은 책 자체보다 떡고물에 더 관심이 많았던 책이다. 문학동네 베스트셀러를 10명을 추첨해서 준다는 말에 혹해, 살까 말까를 반복했었다. 그런 고민을 할 때 표지나 제목에서 오는 매력은 거의 없었다. 단지 "한인 2세"라는 재니스 리 작가의 이력에 왠지 모르게 끌렸다.
아마도 이 책을 읽기전 서평단 도서로 읽은 이민 2세 줌파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의 후광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책 자체보단 떡고물에, 그리고 책 내용보단 작가에 관심이 끌려 예약구매까지 한 이 책이 갑자기 블로그 베스트셀러에 등극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극찬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아니 줄거리 자체는 전후 홍콩에서 피아노 교사를 하던 클레어와 매력적인 남성 윌, 그리고 미모의 혼혈여인 트루디의 사랑이야기라는 것 외에는 딱히 새로울 것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좋다고 추천을 하는 만큼, 우선 내 손안에 들어온 책이니 만큼, 다른 책을 다 물리치고, 우선은 읽고 있던 위대한 유산을 다 읽자마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어젯밤이었는데.. 새벽 3시.. 이 책을 마지막 책장을 덮기까지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트루디와 윌, 그리고 클레어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영국의 한적한 시골에서 자라, 새로운 세상을 처음 맛보기 시작한 클레어의 일탈도, 중국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혈로 자유분방하며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트루디의 변화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는 윌의 과거도..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나타나는 그 이야기 모두 나의 시간을 모조리 앗아갈만큼 매력적이었다.
한인 2세임에도 번역자가 딸린 소설, 줌파 라히리처럼 이민2세의 고뇌를 그린 것도 아닌 그저 1940년의 홍콩와 1950년의 홍콩, 그리고 전쟁과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가가 "한인"이라는 것외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듯 보였지만, 일본과 영국의 전쟁, 그리고 홍콩의 점령모습에서 그 무렵 한국이 일본에 강점당하여 고통에 시달리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일본이 홍콩을 점령한동안 수많은 외국인들은 수용소같은 공간에 갇히고, 배급을 받으며, 많은 것을 약탈당했다. 우연히 쳐다본 것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말을 걸었다 총에 맞았던 것처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였을 때에 우리 국민들은 강제징용되어 소모품처럼 노동력만을 착취당하고, 별 이유없이 죽인 후 그대로 방치하고, 갖가지 조항을 만들고 기관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온 농민을 수탈하는 일본에 아무런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몇몇 눈치빠르고, 잇속빠른 사람만이 그런 일본에 빌붙어 그 시대를 편하게 살기도 했던 것처럼 트루디는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나는 함부로 욕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잇속빠른 사람들은 일본에게 스스로 나라를 바쳤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같은 민족을 약탈하고,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바로 신고를 해버리던 것과는 달리 트루디는 그저 그녀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본인에게 붙어있었을 뿐이었다. 자기로 인해 자신의 민족을 괴롭히거나 수용소에 갇힌 윌을 버리는 일을 하기보단 그저 자신이 살기 위해.. 그리고 그로인해 평생에 자신을 온전히 자신으로만 사랑해주었던 윌을 잃게되었다. 도덕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그녀의 행동을 용인할 수 없었던, 처음으로 자신을 자신으로만 사랑해주었던 그런 남자를..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파티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좋은 상대 이상으로 생각해준 사람도 없었고. 그런 건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일이지. 안그래? 하지만 당신은 나를 사랑했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준 거야. 그리고 그게 진실로 느껴졌어. – 390쪽
조금은 엇갈린 듯 서로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슬픈 운명을 택해버렸고, 너무나 오랜 세월 그런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며 살게되는 윌과 트루디.. 만약 이런 전쟁이 없었더라면 그들의 사랑은 한없이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가득했을 것이기에 그들의 깊고 깊은, 하지만 살짝 어긋났던 그 사랑이야기는 전쟁의 슬픔과 고통을 한층 배가시켜줄 뿐이었다.
떡고물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이 부끄러워질만큼, 재니스 리의 이야기는 때론 전쟁의 참혹함에 몸서리를 치게되고, 때론 불장난같아보이는 클레어와 윌의 사랑행각에 푹 빠지게 되며, 트루디와 윌의 사랑에 안쓰러움을 느끼게 되던, 데뷔작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력이 철철 넘치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