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 세종.문종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비행으로 왕이 될 수 없던 셋째 왕자로,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한채 왕이 된 세종대왕은  오늘날까지도 성군으로 일컬어지며, 조선시대의 다른 왕들이 그저 태조, 정조, 영조 등으로 불리는 것과는 달리 세종이라기 보단 항상 "세종대왕"으로 불리우고 있다. 굳이 이 책을 통해 세종대왕에 대해 배우지 않더라도 평범한 교과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업적 몇가지는 다들 알고 있다.  

세계 어느나라의 언어보다 과학적인 언어라고 자부할 수 있는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발명하신 것이 첫번째 업적이고,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있는 자들을 각각의 전문분야에 등용하였기에 노비출신이였지만 과학적 재능이있던 장영실을 등용하여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하여 조선의 과학을 발전시키셨다는 것이 두번째 업적이며, 노략질을 하는 왜구를 처단하기 위해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 세번째 업적이었으며, 국경지대에 김종서를 파견하여 4군 6진을 정비하였으며, 그 지역으로 평민들을 이주시키고 여진족들을 교화하여 백성으로 삼음으로써 현재의 국경의 모습을 갖추도록 하였다는 것이 네번째 업적이라고 말할 수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기셨고, 이제 기어다니기 시작하는 조선을 걸음마를 할 수준으로 발전시켰던 왕이며, 다른 왕들에 비해 권력과 관련된 피바람을 몰고오질 않았기에 조선의 다른 왕들에 비해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세종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가 사대정책을 사용하고, 조선 중반이후론 소중화사상이 팽배하여 명을 아버지의 나라처럼 모시며, 조공을 받치며 지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세종때에는 그 도가 지나쳤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정도전이 홍무제의 미움을 사서 조선초기 괴롭힘을 당했던 것과는 달리, 단지 조선여자를 좋아했던 중국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여자를 보내고, 사냥에 빠졌을 때면 매를 잡아보내고, 사신이 오면 국경지대에서부터 한양으로 들어올 때까지 끝없는 잔치를 벌여주었으며, 2~3개의 선물상자를 가지고 오면 그 수십배에 달하는 선물을 보냈기에 국경지대는 국경지대대로 계속되는 연회준비에 백성들이 힘겨워하고, 다른 지방은 다른 지방대로 공물을 받치기 위해 매잡으랴, 이쁜 여자를 물색하랴 이래저래 백성들을 괴롭혔었다니..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고생을 하여 한글을 만들었다는 왕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백성을 괴롭힌 꼴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직은 물물교환이 익숙한, 자급자족의 조선에서 화폐를 유통시킨다고 또 한번, 그리고 국가적 입장에선 국경이 강화되긴 하였지만 남쪽지방에 살아 북쪽지방의 기후에 익숙하지 않은 평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북쪽지방의 농민들은 국경지방에 강제로 이주시켜 많은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보면 정말인지 백성을 생각한 왕인지 아니 백성을 괴롭힌 왕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거기에 반해 세조의 왕위찬탈로 아들을 잃은 요절한 왕, 불운한 왕, 병약한 왕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정말 제대로 준비된 왕은 문종이었다. 어린 단종을 납두고, 1년 남짓한 기간을 왕으로 지냈기에 나 역시 문종은 요절한 왕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다른 왕들에 비해 너무 늦게 세자를 본 탓에 단종의 나이가 어렸던 것이지 오히려 성종보다 오래살았던 왕이었다. 어려서 세자가 되었고, 세종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세자로서의 자질을 배웠으며, 세종말년에는 세종을 도와 정무를 처리했었으니 그가 오래살았더라면 세종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았을지도 모르는 그런 준비된 왕이었다. 그런 왕이 단지 종기라는 병에 의해 자신의 뜻도 펴보기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로 인해 다시 한번 조선왕실에 피바람이 불게되었다는 것도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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