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광해군이 명과 후금사이에 적절한 외교를 해왔음에도, 아버지인 선조로부터도, 명으로부터도 한번에 인정받지 못했고, 그래서 동생인 영창대군마저 죽인 뒤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인조는 그런 반정에 의해 왕이 된 사람이었다. 세조처럼 적극적으로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신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왕을 폐위시키면서 공석이 된 자리에 말이다. 그리고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정책을 뒤엎고, 지는 해인 명을 섬기는 친명배금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런 정책으로 정묘호란을 겪고, 형제의 연을 맺었음에도 계속해서 친명배금정책을 시행한 결과 조선은 병자호란에 의해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나라를 위해 애써야 할 사람들이 정찰을 위해 밖으로 내보내면 투항을 하고, 오히려 역정탐을 위해 되돌아오고, 가족을 냅두고 도망을 가며, 사대부란 사람들이,,, 탁상공론 하듯 가마니를 말을 살리는 것이 낫다 아니 군사들에게 주는 것이 낫다라는 논쟁만 할 뿐 실질적으로 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남한산성에서 여전히 청을 적이라 칭할뿐.. 김훈작가님께서는 그런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 때의 그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줄 뿐.. 

말에게 먹일 것이 없어 초가지붕을 뜯고, 쌀가마니 하나를 가지고 군사에게 바람막이로 주었다 다시 빼앗아 말의 먹이로 사용해야했으며, 먹을 것이 없어 비쩍 말라 죽은 말들을 결국은 병사들에게 한끼 식사로 먹여야 하던 시대.. 성안에서 투항을 할 수도, 전투를 할 수도 없던 상황.. 세자를 내줄수도 내줄수도 없는 그런 상황.. 결국 삼전도에서 청의 왕에게 신하로써의 예를 다할 수밖에 없던 그런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척화론을 주장하던 김상헌도, 주화론을 주장하던 최명길의 마음도 결국은 나라를 생각하는 하나의 마음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래도 너무 슬픈 역사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 신하의 예를 다한 것도, 그 전투로 인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었던 것도, 젊은 여성들이 청으로 끌려가야만 했고, 그로 인해 자결해야만 했던 것도 지금보면 너무 슬픈 역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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