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야, 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려면 '그날 밤'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꺼내려면 스스로 잠근 문을 열어야 했다. 문을 열면 죽을 힘을 다해 가둔 기억들이 몰려나와 내 숨통부터 끊어놓을 터였다. 기억은 거기 그대로 있어야 했다. 겨울 뱀처럼 동면해야 했다. 아니, 죽은 자처럼 영면해야 했다. 나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53쪽
숲은 기묘한 빛을 띠었다. 어두우면서도 눈을 시리게 하는 흰빛이었다. 아니다. 흰빛이 아니다. 광휘라 해야 옳을 것이다. 곧게 뻗은 나무들의 수피가 뽑아내는 서늘한 광휘. -156쪽
승민은 보호사나 진압 2인조에게 소리치는 게 아니었다.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세상의 총구들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내 심장을 쏘라고. 그래야만 나를 가둘 수 있을 것이라고. 직감은 불길한 예언을 내놓았다. 이놈은 스스로 죽을거야.-264쪽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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