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보통 책을 선전할 때 '한 번 잡으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놓을 수 없는 책'이라고들 하지요? 오늘 오랜만에 그런책을 만났네요. 정말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습니다. 이 책을 샀더니, 아내도 첫장을 열고는 새벽 2시까지 읽더군요.^^
히가시노 게이고, 원래 본업은 추리소설 작가입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작품으로 특히 유명해졌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얻다가 아예 유승범과 이요원이 주연을 맡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영화는 생각보다 별로였답니다--;;) 그 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들이 속속 출간되었지요. 저도 추리소설을 워낙 좋아해서 여러권 읽었는데요, 확실히 일본 추리소설은 서양 추리소설과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는데 탁월하지요. 추리소설이 아닌 이 책에서도 그런 심리묘사가 탁월합니다. 그리고, 추리소설 작가답게 복선을 깔고 반전을 보여주는 솜씨가 매우 훌륭하구요.
쇼타, 고헤이, 아쓰야. 이 3인조는 좀도둑입니다. 어느 마을의 빈집을 털다가 '일이 틀어지면서' 근처에 있던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폐가에 허겁지겁 숨지요. 30년 정도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집에서 하룻밤만 보내고 도망칠 생각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닫혀진 셔터의 우편함에서 편지 한통이 툭 떨어집니다. 이 시간에 이런 집에 편지라니! 누군가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뭔가 알려주기 위해서 편지를 넣은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편지가 제법 두툼합니다. 그들을 보고 급히 쓴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누군가 그냥 넣은 것입니다. 이런 폐가에 편지를? 무슨 이유일까요?
궁금해진 그들, 편지를 뜯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묘한 편지입니다. 고민상담편지였거든요. 그것도 완전 진지한 고민상담 편지.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섬세함이 떨어지겠지만 지면관계상 요점만 정리해볼게요.
"저는 현역 여자 운동선수입니다. 내년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맹훈련중이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려서 반년 밖에 안남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상황에 개의치 말고 저에게 훈련에만 집중해서 올림픽에 나가라고 합니다. 제가 올림픽에 나가는게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구요. 그래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운동도 그만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훈련에도 집중할 수 없구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미야 잡화점에 고민 편지를 넣으면 좋은 충고를 해 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엥? 이게 뭡니까? 3인조 백수 좀도둑은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집안에 있던, 40년전에 발행된 주간지에서 그 답을 알게 되지요.
40년 전에 이 곳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곳의 주인 나미야 할아버지가 동네 아이들의 고민에 너무 진지하게 답해주다가 그게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고민 편지를 우편함에 넣으면 꼭 다음날 아침에 그 할아버지가 답을 써서 우유상자에 넣어준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그분의 자손들이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잡화점은 망했는데도 계속 고민상담은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 여자는 이제는 고민 상담을 안한다는 것도 모르고 이렇게 편지를 보낸 것일까요? 어쨌든 신기한 일입니다.
뭐, 어떻게 된 일이든 그들과는 상관이 없지요.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도망칠 테니까요. 그런데, 묘하게도 그들은 궁금해집니다. 이 여자선수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리고는 마침내 엉뚱하게도 자기들이라도 답장을 보내기로 합니다. 자기들 처신도 제대로 못하고 빈집이나 터는 신세여서 제대로 된 현명한 답을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열심히 살라고만 해도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지요. (이런 오지랖하고는..마음씨는 착하다니까요.)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이렇게 씁니다.
"편지 잘 읽었습니다. 힘드시겠네요. 그런데 혹시 전지훈련을 갈 때 남자친구를 데려가면 안될까요? 별로 좋은 충고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 나미야 잡화점"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요.ㅋㅋ 일본인들 특유의 스미마셍 문화가 드러나네요)
그렇게 써서 우유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아참! 답장에 지문이 묻었을 수도 있습니다! 허겁지겁 우유상자를 열었는데 으악! 방금 넣은 답장이 없어졌어요! 놀라고 있는데 또 으악! 우편함에 편지가 또 도착합니다.
"어젯밤 편지에 이렇게 빨리 답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충고는 고맙습니다만, 그 사람 건강이 너무 나빠서 같이 갈 수는 없답니다.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다시 충고해주세요. 내일 아침에 우유상자를 열어 보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아니, 5분전에 우유상자에 답장을 넣었는데 두 번째 편지라니요! 누군가 집 안에서 이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면서 놀리고 있는 걸까요?
이들은 이제 그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다시 시도합니다. 대충 답장을 썼지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휴대폰으로 영상통화를 하시면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 나미야 잡화점"
그렇게 답장을 써서 우유상자에 다시 넣고 주변을 감시하지요. 그런데... 그 누구도 우유상자에 접근하지도 않았는데 세 번째 편지가 다시 날아옵니다.
"두 번째 답장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휴대폰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뭔가 전화와 관계된 것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자.. 이제 3인조 도둑 겸 상담가는 진짜로 이게 무슨 일인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지요. 지금은 2013년, 작년에 런던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내년에 올림픽에 나가려고 훈련한다니요? 등등..
여러분도 이제 눈치채셨습니까? 아, 이 나미야 잡화점은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는 장소였던 것입니다! 영화에서도 가끔 나오잖아요. (2000년도에 유지태와 김하늘이 나왔던 '동감', 이정재와 전지현이 나왔던 '시월애'가 있었지요.) 이제 이 소설은 판타지소설이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이제 약간의 사명감을 가지고 다시 과거로 답장을 씁니다. 자기들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듣고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에도 감격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편지를 두 번 정도 주고 받아본 그들은 경악합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시대는 1979년 이었고, 그녀가 말하는 올림픽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이었거든요. 그게 왜 놀랍냐구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그 올림픽을 보이코트했거든요! 으악!
이제 뭐라고 상담해주어야 하는지는 결정되었습니다. 어차피 노력해도 나갈 수 없는 올림픽이니까요. 그렇다고 미래에서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들은 이제 그녀가 올림픽을 포기하고 애인 곁에 있게 해주려고 열심히 답장을 씁니다. "그까짓 올림픽이 뭐가 중요하냐, 그래봐야 큰 운동회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면 마지막까지 곁에 있는게 맞다..."
이러면 그녀가 자기들 말을 듣고 마음을 정할 줄 알았는데, 어라? 그녀의 편지는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망설이는 것이지요. 자신의 진심을 잘 모르겠다나요.
이것 참.. 3인조 얼치기 고민상담가들은 가슴이 타들어갑니다. 이걸 어떻게 말려야 할까요? 이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뒷부분은 읽어보세요. 반전이 있답니다.^^)
이 고민상담소 나미야 잡화점을 배경으로 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몇개가 더 펼쳐집니다. 계속해서 이 3인조 도둑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니구요,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면서 이 고민상담이 처음 시작되었던 나미야씨의 이야기, 그의 아들 이야기, 그리고 그곳을 통해 도움을 받고 연결되는 현재와 과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펼쳐지지요. 하나하나 모두 감동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낄낄거리게도 하고, 울컥하게도 하지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삶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갈 수록 점점 드러나는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들을 보면서 작가의 솜씨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마지막 부분에는 3인조 도둑이 나미야 잡화점에 숨어들게 된 사연까지도 모두 연결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아.. 이렇게까지 이야기들을 엮어내다니요. 정말 흥미진진해서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다니까요!
이 '잡화점 고민 상담'을 시작한 나미야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는 에피소드에서는 그의 철학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나미야 할아버지는 어떤 질문에도 진지함을 가지고 답을 해 줍니다. '공부 안하고 100점 받는 방법이 뭐지요?','산타클로스가 오면 좋겠는데, 굴뚝이 없어요'와 같은, 장난이 분명한 질문에 대해서도 말이지요. 그런 모습을 보며 답답해하는 아들에게 나미야씨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널 아직 뭘 모르는구나. 진지한 상담자들이나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이나 근본적으로는 같아.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렸고 거기서 중요한 뭔가가 쏟아져 나온거야. 증거를 대볼까?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반드시 답장을 받으러 찾아오거든. 그들도 내가 어떻게 답을 할 지 궁금한거야. 그래서 진지하게 답을 해 줘야 해. 인간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돼."
아... 이런 마음이었군요.
저도 이렇게 저렇게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답'을 말하는 때가 많아요.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상담을 청하는 사람의 입장에 함께 서서 열심히 그 고민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제 입장에서 답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제가 지혜로워봤자 얼마나 지혜로우며, 경험해봤자 얼마나 더 경험했겠습니까? 혹시, 저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너무 가볍게 받아서 또한 가볍게 답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아무래도 장난 같은 질문에도, 심지어는 백지 질문지에도 밤을 새워가며 답을 고민하고 적어준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한 수 배워야 할 듯 합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표면적으로는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신기한 현상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기적은 그 공간에서 진지한 경청과 대답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 우리 공동체에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야할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