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평점 :
궤도 - 서맨사 하비
-외계 문명이 본다면 아마도 의아할 것이다. 저것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왜 맴돌기만 하는 거야? 모든 질문의 답은 지구다. (p.10)
-이 대단한 궤도를 돌고 있는 한 당신은 무사하며 무엇도 당신을 건드리지 못한다. 지구가 우주를 질주하고, 시간에 취한 당신이 빛과 어둠을 뚫고 전속력으로 그 행성을 뒤쫓는 한, 끝은 없다. 끝은 있을 수 없다. 오직 돌고 돌 뿐이다. (p.27)
-태양계들과 은하계들이 마구 흩어진 세계. 시공간의 왜곡이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시야가 깊고 다차원적인 세계. 이것 봐, 어떤 아름다운 힘이 아무런 의도 없이 내던져 놓은 게 아니면 이런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데? (p.81)
-그때도 존재할 우주력에서 인간이 무엇을 했고 존재했는가는 1년 중 딱 하루, 찰나에 깜박였다 사라지는 빛이어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p.201)
-모든 곳에 생명이 있다. 모든 곳에. (p.212)
-
오래전,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2024년 부커상을 수상한 서맨사 하비의 「궤도」 역시 ‘작고 푸른 점’을 바라보는 우주 비행사 여섯 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은 스물네 시간 동안 열여섯 번의 일출과 일몰을 반복하며 우주의 궤도를 공전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도 그들과 함께 똑같은 하루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우주에서의 하루가 섬세하고 다정한 언어로 서술되어 있다.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 안톤, 로만, 넬, 치에, 숀, 피에트로는 국적도 성별도 다르지만 우주정거장에서 지구를 관찰하는 임무는 같다. 그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구는 너무나 아름답다. 서맨사 하비의 유려한 묘사가 더욱더 그 광경을 감동적으로 만든다.
사실 그들의 하루는 매일 똑같을 것이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우주복을 입고 팩에 든 음식을 먹으며 늘 반복된 일을 한다. 그러나 지구는 단 하루도 같지 않기 때문에 매일 보는 풍경도 경이롭다. 하루에 지구를 열여섯 번 돌지만 그들은 매일 기록하며 ‘새날의 아침’을 확인한다. 가끔은 지구에 두고 온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기도 한다. 태풍이 발생하고 어떤 지점을 향해 가는 것을 관찰하지만 어쩔 수는 없다. 지구의 여러 많은 문제를 우주에서 바라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우리 존재가 아주 작을 뿐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어서 그런가. 쓸쓸한 느낌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도 별것 아니라는 위로가 됐다. 이처럼 서맨사 하비의 「궤도」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나는 인류가 우주를 연구하고 탐사하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지만, 간혹 그들의 목적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가 있었다.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찾아 이주하는 것은 과연 인류의 소망일까? 「궤도」에서도 우주여행의 새 시대에 우리는 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 질문한다. 하지만 인류의 미래를 쓰는 건 우리가 아니라 우리는 써 내려지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역사가 되고 다가올 미래가 된다는 부분을 읽으며, 어떤 일이든 이 우주에서 의미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건 1969년 최초로 달 임무에 성공했을 때 찍은 콜린스의 사진에 관한 부분이다. 달 착륙선과 지구를 찍은 사진에 빠진 사람은 사진을 찍은 콜린스다. 하지만 안톤은 사진을 촬영하는 순간 그 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인간이 콜린스라고 했다. 우주 속 유일한 인간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좋았다. 그 밖에도 우주 비행사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부분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바라보는 지구와 인간, 우주에 관한 시선이 마음에 든다. 반복되는 우주정거장의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인류의 미래 같은 거창한 질문도 있지만, 계속해서 느껴지는 유대감이 훨씬 더 이 책을 풍요롭게 했다. 결국 인간이기에 지구와 이어져 있다는 게 뭉클하다. 「궤도」를 읽으며 때론 새카만 우주 속 우주인이 된 기분이 들곤 했다.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서정적인 여정을 이 책과 함께하시길 추천합니다. (인문, 역사, 사회과학 책을 내는 서해문집의 첫 외국 소설인 만큼 정말 좋은 책입니다)
-이 게시물은 서해문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궤도 #서맨사하비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