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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평점 :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 안보윤
-나는 전수미 때문에 달력 뒷면에 인쇄된 그림처럼 살았다. 백지로 남겨두기 뭣해서 인쇄는 했지만 1년이 다 가도록 누구 하나 뒤집어보지 않는 뒷면 그림 말이다. 그럼에도 1월에는 해돋이를, 3월에는 벚꽃을, 9월에는 보름달을 채워 넣는 악착같은 마음으로 나는 살았다. (p.10)
-나는 전수미에게서만 벗어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전수미가 있었다. 나는 세상 모든 곳의 뒷면이었다. 온 세상이 내게 전수미였다. (p.117)
-비밀을 삼킨 채로는 자작나무처럼 위로 뻗어 나갈 수 없다. 비밀은 너무 크고 무거워 나를 땅속으로 가라앉힌 뒤 도무지 도망칠 수 없게 뿌리로 옭아맬 테니까. 그러니 나는 모든 비밀을 토해낼 것이다. 더는 세계의 뒷면에 나를 가둬두지 않을 것이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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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는 ‘전수미’가 아니라 전수미처럼 되고 싶지 않은 모든 ‘전수영’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의 화자인 수영은 한 살 터울의 언니 전수미를 증오하며 살고 있다. 전수미는 어릴 적부터 온갖 악행을 저질러 온 친언니다. 처음에 읽을 때는 소설 속 전수미의 행동이 너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지?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을 만큼 전수미의 행동은 비상식적이다. 문제 아동을 넘어선 전수미의 행동은 기괴하기까지 하며 가족들을 괴롭히고 군림하면서 희열을 느낀다. 그 속에서 전수영은 오로지 피해자였다. 부모는 늘 전수미에게 휘둘렸고 그 바람에 수영에게는 무심했는데, 어린 수영이 세 개의 화분만을 심고 싶었다는 대목에서 조금 슬펐다. 전수미가 사고를 칠 때마다, 전수미의 부모가 교사에게 우리 애 마음은 살펴줬는지, 애가 뭘 알겠냐고 따지는 것을 보며 양육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내내 생각하면서 읽었지만 다 읽은 후 깨달았다. 제목에는 전수미가 있지만 정작 전수미는 딱히 등장하지 않는다. 전수미는 그냥 그 자체로 ‘악’의 표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딱히 전수미의 행동에 이유도 없고 서사도 없는 것 같다.
수영의 현재 이야기는 자신이 일하는 노견 돌봄센터를 무대로 진행된다. 일종의 반려견 호스피스로 일하는 수영은 구원장이 노견을 안락사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노견 태풍이가 아픈 것을 숨긴다. 하지만 구원장은 오히려 그런 수영 때문에 태풍이가 더 고통스럽게 아파했다고 비난한다. 전수영과 다르게 전수미는 요양원에서 일하며 노인들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소설은 꽤 무겁고 생각할 부분이 많았는데, 누군가의 돌봄과 그 돌봄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을 때의 죄책감을 누가 가지느냐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곳에 전수미가 있다는 건 어딜 가도 전수미 같은 악인이 있다는 말과 같았다. 전수미와 구원장으로 대표되는 악인이 있다면 반대로 전수영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인물이었다. 전수영이 무조건적인 선으로 묘사되지 않아서 좋았다. 전수영이 선의로 행했던 태풍이에 대한 배려가 어쩌면 선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게 현실적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전수미가 아니라 전수영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후반에 전수영이 스스로 고발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부분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전수영들을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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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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