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개비에는 의자가 없다 시작시인선 166
민용태 지음 / 천년의시작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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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에는 의자가 없다』 - 민용태 저 / 천년의시작

쉼 없이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너에게 쓰는 나의 시는 - 민용태

 

나의 손가락에서 너의 눈자위까지

나의 입술에서 너의 귓바퀴까지

네 몸에 쓰는 나의 글씨는

콩닥콩닥 너의 가슴 두들기고

너는 피아노 나는 피아니스트

너와 나 사이 음악은

나의 손가락 끝에서 너의 속눈썹으로

나의 입술에서 너의 귓바퀴로

나의 손에서 너의 가슴으로

나의 몸에서 너의 골짜기로

어루만지듯 파고드는

너와 나 사이 음악은

 

 

하루종일 비가오던 십일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 아침일찍부터 하루종일 내내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다름아닌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의 주례를 부탁드리러 은사님을 뵙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 

 

요새는 주례없는 결혼식도 많이들 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나는 꼭 주례가 있는 결혼을 하고 싶었다. 형식을 꼭 갖추겠다는 뜻이 아니라 주례를 꼭 부탁드리고 싶었던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 큰 의미가 있는 분께 좋은 말씀을 부탁드린다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상황에 닥쳐보니 바쁜 연말연시 가뜩이나 지방에서 올리는 결혼식의 주례를 부탁드린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더라. 그래도 결국 한 번은 겪어야 할 일, 민 교수님께 장문의 메일과 연락을 드렸다. 교수님은 기꺼이 나를 반기며 바쁜 시간을 할애해주셨고, 학여울의 한 센터 앞에서 뵙기로 했다.

 

주례를 부탁드릴 교수님은 바로 민용태 교수님. 일전에 '도전 지구탐험대'의 탐험대장 등으로 방송도 타셨던 분인 만큼, 또 소설 돈키호테를 번역한 분으로도 꽤나 유명하신 분이다. 하지만 내가 교수님께 주례를 부탁드리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교수님을 처음 뵜었던 것은 몇년 전 졸업 전 마지막 학기 교양수업에서 였다. 당시는 학교를 휴학한 상태로 한창 일을 하다가, 마지막 졸업을 위해서 몇 년만에 학교로 돌아갔던 시기였다. 이미 내게 학점이란 의미있는 것들이 아니었기에, 보다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자 앞으로도 도움이 될 것같은 교양과목들을 골라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그 중 민 교수님의 강의도 있었다. 과목명은 '행복의 과학'. 애매모호한 제목만큼이나 학생들에게도 애매모호한, 호불호가 갈리는 수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수강한 결과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과목이었다. 옛 선인들처럼 문답식으로 진행되는 강의하며, 통시적/공시적으로 현재의 우리를 진단하고 우리에게 적합한 가치를 생각하는 방법을 알게해준다던지, 혹은 검증되지 않은 가치들이 과잉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떤 식의 대처를 통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리움과 단절의 한계를 들숨과 날숨에 비유해서 사랑의 속성을 설명해주신 것까지 많은 내용들에 큰 공감을 하곤 했었다.

 

강의의 진가는 사실 수강을 하던 시점보다 다시 사회로 돌아가 일을 할 때 더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일들이 그렇겠지만 100% 만족스러운 과정과 결과를 얻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욕심이 많은 내게 그런 상황들은 '행복하지 않다'라는 생각을 들게 했고, 이내 그 생각들은 '불행하다'라는 생각으로, 여기에 업무에 치여 정신없는 시간까지 보내다보니 '행복인지 불행인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 즈음 교수님의 강의가 떠올랐다. 그리고 삶에 치여 내가 어떻게 떠내려가고 있는지, 그 속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일어서야하는지 조금씩 객관적인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완전히 만족하는 삶은 아니지만, 적어도 행복해지고 있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다. 더 이상 내 삶과 시간에 쫒기지도 않는다. 방향성을 잃지 않았으니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당연한 믿음을 이제는 잃지 않는다. 이런 과정들을 겪고나니, 앞으로의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결혼의 주례만큼은 민 교수님께 꼭 부탁드리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몇 번 연락을 드렸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직접 찾아뵙는 것은 정말 간만이었다. 빈손으로 찾아뵙기도 그래서 얼마 전 출간된 교수님의 시집 한 권과 적당한 와인 한 병을 샀다.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 시집을 읽어본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나에겐 아직 교수님의 시는 어렵다. 다만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었기 때문일까? 들숨과 날숨, 생명, 사랑... 교수님이 늘 '풍류'라 일컫는 그 가치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점은 교수님의 기존의 시집에 비해서 나이듦에 대한 서글픔이 못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고주목 - 민용태

 

나에게 고독 대신 고목 남겨 두고

나 돌아간 뒤

내 곁에 국화꽃으로 피어

나를 위한다 위로한다 마라

하늘에는 구름만 피고

바람만 불고

 

삶이 죽음보다 젊다

똥밭에 뒹굴어도

이 똥이 죽음보다 좋다

죽어서 사는 것은

죽어서 볼 일이고

 

고주목

너의 삶과 죽음의 길이로

빨갛게

나의 하늘을 재라!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교수님을 뵈었다. 지역의 몇몇 시인 분들과 함께 시 강좌 수업을 진행하셨단다. 자연스레 시인 분들의 아지트로 가자시며 근처의 한 국밥집으로 나를 데려가신다. 그럴싸한 한정식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나 역시 어른분들을, 그리고 나름의 자기철학을 담을 줄 아는 문예가 분들을 동경해왔었기에, 이렇게 격없이 어울리는 자리도 껄끄럽지 않다. 막걸리와 맥주. 그리고 웃음이 오가는 자리. 오히려 덕분에 덕담도 그리고 진심어린 삶의 충고도 아낌없이 들을 수 있었던 좋은 자리가 만들어졌던 것 같다.

 

바쁘실텐데 그 와중에도 어려운 시간을 내주시겠다며 주례를 승낙해주신 민용태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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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도 어김없이 한 해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네요.

후회보다는 감사, 그리고 행복과 안도감이 가득한 한 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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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 제2회 퍼플로맨스 대상 수상작
박소정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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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 박소정 저 / 다산책방

사람도 사랑도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








결혼을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있는지라, 대구에 있는 본가에 자주 내려가게 된다. 그렇게 최근 몇 주동안 몇 차례를 왕복했건만, 지난 주말 본가에 머무를 때에는 막상 부모님과 사적으로 보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긴 내 앞가림하기에도 바쁜 시간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손 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집 근처의 수목원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산책을 나섰다. 주말이라 그런지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 한결같이 아름답게 핀 꽃들에 아낌없는 감탄사를 선사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셨다. 



연륜의 차이인지 타고난 천성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에 비하면 부모님은 생명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다. 또래에 비해서는 나 역시 정이 많은 편이라 자부하지만, 아직 정을 주고 받는 것의 무서움을 몰라서일까? 확실히 부모님 보다는 애완동물이건 꽃이건, 수목이건 쉽게 정을 붙이고 쉽게 정을 떼는 편이다. 부모님의 경우는 뭐랄까, 대단히 조심스러운 느낌이 든다. 꽃이건 애완견이건 수목이건 스스로 정을 주며 기른다고 결심을 가지기까지 무척 오랜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번 정을 붙이고 기르는 대상이 되면 최선을 다해서 대상을 가꾸고 기르신다. 짐작이건데, 아마도 젊은 나보다는 생명의 가치를 더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정을준다는 것에 담긴 '책임'의 의미를 더욱 잘 알고 계시기에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키우는 화분들은 금새 시들시들해지는 반면, 본가에 있는 꽃과 수목들은 죄다 싱싱한 걸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기른다'라는 것은 어찌보면 조금 이기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다 싶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을텐데... 그 가치들은 때로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으로, 때로는 후각적인 향기로, 그렇게 저마다의 형태로 표현될텐데 오직 수용하는 사람의 구미에 맞춰서 그 가치를 평가하고 일방적으로 정을 준다는 건 참 잔인한 일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가 어떤 대상으로부터 가치와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도 성립이 되는 것 같다. 게다가 그 대상이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향기 중에서 가장 더러운 것도, 가장 진하고 아름다운 것도 사람의 향기라 믿고 있다.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연애를 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상대방에게서 좋은 냄새가 느껴진다고 한다. 각자의 체취도 있겠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이 상대방의 여러 요소들을 기꺼이 감수하고 수용하겠다는 심경의 변화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그것은 곧 사랑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테니까.



최근에 박소정 씨의 소설 [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를 읽었다. 말랑말랑한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향을 고르는 장인을 뜻하는 조향사 수연과 조선 중기의 봉림대군 간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 달달하지도, 그리 향기롭지도 않은 조금 실망스러운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우선 읽는 독자인 본인이 감정이 매말랐기 때문일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낭만이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청춘이기에 그 가능성은 배제하고 살펴보면, 소설의 전개에 있어서의 문제도 한몫하는 것 같다. 전반부에서의 수연의 삶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자연스러운 흐름은 쉽게 소설 속에 녹아들게 하는 매력이 있으나, 중반부에서부터 시작되는 로맨스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거의 표현하지 않은 채 지나치게 빠른 흐름으로 생략해버리고 있어 아쉽다. 조선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보니 자연스레 신분과 시대의 한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사랑의 감정이라는 건 그래도 전 시대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감정이 아니었던가? 그 부분에서 정말 '사랑하는 것이 맞나?'하는 약간의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건, 두 사람의 로맨스에는 위에서 말했던 '책임'이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랑의 책임에는 '상대방을 알아주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왠지 '가슴앓이' 정도라고 말해야할 것 같은... 바로 그런 느낌 말이다. 저자분이 역사와 향기에 대해서 많은 조사와 공부를 한 것이 느껴지지만, 그런 특색 때문에 사랑의 본질이 선명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사랑의 풋풋함'이라는 말로는 감출 수 없는 소설의 한계가 아닐 듯 싶다.

 

그럼에도 사람의 향기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느끼고 사랑한다는 컨셉은, 분명히 굉장히 로맨틱한 부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익숙한 향기만큼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도 없고, 막 시작한 연인의 향기만큼 가슴 설레게 하는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의 향기를 통해 감정을 느낀다는 건 그 사람의 외향적인 요소가 아닌 사람의 본질을 바라봄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향기를 느낀다는 것은 내 감정들에도 솔직히 대면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의 본질일테니까 말이다.

 

고교시절, 한 여자아이에게 고백했다가 뚱뚱하다는 이유로 차인 방울친구가 있었다. 실연당한 그 친구가 그 이후로 한 달만에 110kg에서 70kg으로 40kg을 감량하고 내게 한 말이 있다. "참 유치하게 느껴지겠지만, 때론 로맨틱 드라마나 연애소설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그건 그 소설과 드라마가 사실에 가까워서가 아니라 매마르기 쉬운 사람의 감정에 따뜻한 바람을 불게 해주는 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 당시만 해도 뭔 개소리냐며 웃으며 대화를 넘겼지만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내게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타인들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랑의 본질이 아닌 외향과 순간의 감정만을 추구하며 스스로의 가벼운 감정들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위로하는 현대인들에게, 어쩌면 이 소설은 마음을 녹여주는 따스한 훈풍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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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출판의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지원된 도서에 관한 서평입니다.

직접 독서 후 어떠한 사심없이 솔직하게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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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기낙경 지음 / 오브제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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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 기낙경 저 / 오브제 출판

나에게 작은 위로를 건낸다







요즘, 날씨가 지나치게 춥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그래서 어느정도는 추워져야 되려 사람 손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서도, 미처 준비되지 않은 맹 추위에 마음까지 얼어붙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고보니 연말이 다 되었다. 매년 이 맘 때 즈음이면, 나의 올 한 해를 무가치한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연말병'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게다가 이번 연말병은 '서른'이라는 꼬리표까지 달고있어 평소보다 더 많은 부질없는 반성들과 후회를 동반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독종이다, 아주.

 

이십 대, 그리고 싱글라이프의 마지막을 고하는 겨울을 보내는 요즘. 한 권의 책이 내 시선을 끈다.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이라는 뭔가 묘한 느낌의 책. 작가인 기낙경씨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지만, '서른'이라는 단어와 '의자'라는 사물이주는 묘한 동질감과 매력에 나도 모르게 한 두 페이지씩 그녀의 생각을 따라가보게 된다.

 

'의자'가 가질 수 있는 여러 의미를 따라 서른 즈음의 작가가 겪었던 생각들을 매력적인 문체로 써내려간 책. 때로는 과거의 연인과의 이야기로, 때로는 친구들과의 대화로, 때로는 읽고 본 책과 영화 등으로 나름의 서른을 정의하는 그녀. 책을 보는 내내 의자, 자리라는 것은 단순한 사물 혹은 누군가의 소유물, 그리고 생활흔적 정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위치와 마음의 씀씀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한 사람의 '흔적'과 '도량'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간은 사람의 흔적이 깃들어야 특유의 시간과 냄새가 베여든다'는 저자의 말 역시 내게도 예외는 아니니까 말이다. 짧다면 짧고, 길었다면 길었을 서른이라는 시간동안의 나. 그리고 내가 머무르며 앉아있는 지금의 이 의자에는 얼마만큼의 어떤 종류의 흔적들이 베여있는 것일까?

 

쉼 없이, 때론 힘들게, 때론 신나게 달려왔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또 다시 걸음을 재촉하기 이전 잠시 의자에 앉아 생각해보는 시간 '서른'. 이처럼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삶의 스펙트럼을 동반한 '나'라는 존재를 포괄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면서, 자연스레 내 생각들도 만남과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 주제를 바꾸어 나간다. 지금도 내 주변에 남아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들이야 말로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에. 사람을 잃는 것을 거의 공포처럼 생각하는 내게, 사실 한 해의 반성과 후회의 대상 모두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것' 혹은 '그 결과로 내게 돌아오는 것' 인 것을 감안하면 나의 '서른'이 이러한 '사람'과 '관계'로 귀결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 행운아다. 철 없던 이십 대의 정신없던 순간들을 오롯히 기억해줄 동반자가 옆에 있으니 말이다. 나는 지인들과 후배들이게 우스겟소리로 짧고 많은 횟수의 연애를 추천하곤 하지만, 사실 내가 피 끓는 이십 대 동안 가장 잘한 일이라면 긴 시간동안 한 사람을 마음을 다해 좋아하고 사랑해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난 10년의 연애동안 그녀에 대해 더욱 알고 싶어했던 순수한 감정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만큼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었다. 사랑하면 연인이 마치 거울처럼 느껴진다고 하는 것처럼, 오랜 기간의 연애를 통해서 그녀와 나 모두가 보다 성숙해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축복은 이제 앞으로의 시간도 함께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가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같은 시절과 시간을 함께 겪고 느끼는 것 이상의 위로와 공감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한 작가가 서른 즈음에 느꼈던 감정들이, 단순히 비슷한 시절에 느낀 생각들이라는 점 때문에 나에게 그럴싸한 위로한 되었던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나만의 의자를 따뜻하게 데워둘 생각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혼자가 아닌 함께 앉을 수 있는 보다 아늑한 의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앞으로의 내 삶들, 그리고 '우리'로서 함께 걸어나갈 나의 서른을 스스로 응원해본다.





[쾌속 시간 열차]

 초침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아침의 의식비단 나만의 아침 풍경은 아닐 것이다사실 이십 대까지만 해도 이렇듯 시간의 무게에 눌려 있다는 느낌은 적었다돌아보면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얼마간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다하지만 서른을 넘기고 나니 지난날이 아깝고 다가올 날이 두렵다는 의식이 지배적이다세월이 무서워지니 점차 시간의 위력을 실감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오직 평화로운 시간만 센다'라고 시간의 단위를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p.18

 

[젊은 사람의 깜냥]

 그림자가 어두우니 내 얼굴과 마음도 시꺼멓게 탔다고 우겼다우기다 보니 그게 나였고 내가 그 증거였다. - p.29 

 현실이라는 칼날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의외로 밀도 있는 '자기 알기'를 체험해야 한다. - p.30

 

[여배우들]

 누구나 제 나이듦을 감지하는 때가 있는데 나 역시 서른을 넘기며 자연스레 생기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직감하고 산다. (중략비슷한 동년배들과의 대화 주제도 대부분이 그 '예전같지 않음'에 대한 말들이다하지만 철없던 십대나 어떤 의미에서 실수를 연발하고 살았던 이십대가 그립지 않다다만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흔한 말로 섹시한 눈빛이며 포즈 취하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책도 많이 읽고 공부에 맛들이며 내적 성장을 위한 시간을 먼저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나는 외려 멋있게 나이든 사람 얼굴에 삶의 무게가 깃든 사람들에게 더 끌리는 편이다. - p.47 

 사실 젊은 날 거짓을 배운 사람과 정직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얼굴은 나이가 들면 들통나게 마련이다누군가는 자꾸 무엇을 채우고 덧대었지만 허위가 보이고 누구는 자꾸 버리는 것이 습관이 돼 빈약한 듯하지만 진정의 뼈대만은 튼튼하다나는 그런''를 탐하는 것이다. - p.49

 

[도시의 잠언]

 지난 시간이 무색해지고 첫 마음의 열기나 청신함은 얼마쯤 색이 바랬다내가 앞으로 넘어야 할 걸어야 할 길보다는 거기 있다는 성공이니 성취감이니 하는 말보다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들이 먼저 보인다. (중략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갖게 된 여러 지능적인 태도들이 그렇다스스로 치이고 주저앉다 보니 생기게 된 계산적인 마음들이 아쉽다노하우라는 것들이 되려 나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 p.59 

 마음이 바쁘고 그걸 돌볼 시간조차 없는 날들그런 날의 연속일 때는 뒷산에라도 올라가보자가서 30분만이라도 푸른 것들에 눈을 돌려보자사람관계에서 오는 독은 사람으로 풀면 안 된다자연으로 풀어야 한다. - p.59 

 결국 안의 상처는 바깥을 응시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시간 속에서 아문다안과 밖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의 깊이는 바깥에 대한 사유가 얼마나 풍성하냐에 따라 좌우된다. - p.61

 

[영웅들]

 어떤 이와는 순간을 어떤 이와는 생활을 어떤 이와는 여행을 함께하고 싶다감성을 자극하고 기분 좋은 긴장을 심어주고 느긋한 평화를 지겨워하지 않는 이들이라 믿고 싶고, 또 그렇게 욕망한다기꺼이 나의 영웅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 p.87

 

[눈물의 근육]

 사람들 사이에서 연인 앞에서 사회 속에서 나 역시 기억을 위장해 숱한 고백을 했고조언을 뱉어냈다. (중략깊은 기억들.함부로 꺼내보지 않는 기억일수록 그 멍울은 온전하지 않다어디 한 군데 해지지 않는 곳이 없다새로 기워 덧댄 흔적도 없지 않다시간이 스며들고 오해나 거짓이 끼어든다사탕발림도 숨어 있다기억이 멍울 속에 박혀 있기에 그 추억은 적잖이 상처 입은 몰골이다하지만 찰나의 이미지 속에 빠지지 않고 깃든 것은 바로 빛그러이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도언젠가 그 빛을 더듬어 찾아내야 하는 이유도 바로 빛 때문이다. - p.92

 

[침묵]

 어린 시절이야 멋모르고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곤 했지만 '말 없음'을 지극히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라고 배워온 나이에 이르러서는 '침묵'이란 그야말로 작정하고 뱉어내고 실행에 옮기는 단어인 것이다. - p.137 

 말이 나를 상하게 하고 말이 어떤 진심을 훼손시킬 때아니 이런 부지불식간의 멍들을 느끼지도 못한 채 일상은 흘러가고 관계는 방치된다그 의식하지 못한 멍들이 진해질 즈음아마 그때쯤 나는 혼자 하는 식사를혼자 떠나는 여행을바로 침묵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39

 

[의자의 향기]

 비록 서럽도록 외롭고 쓸쓸하다 하더라도 그 의자가 지난 멋은 쉽사리 흉내내지 못한다떠도는 것을 멈추고 정주한 의자는 함부로 끌어내지 못한다다만 슬며시 앉아볼 뿐다만 슬며시 바라볼 뿐은은한 의자 향을 맡아볼 뿐이다무릇 시간의 옹이가 박힌 것들은 저마다 차향이 난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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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움 보다 따뜻함이 더 오랫기간,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른이라는 시기는 이제 뜨거움보다는 따뜻한 삶을 지향하게 되는 전환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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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알랭 드 보통 저 / 문학동네 출판

뉴스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앞서 [뉴스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뉴스의 시대』1편](링크) 에서 오늘 날의 뉴스에 산재된 문제점들과, 그것을 올바르게 수용하는 법에 대해서 분야별로 알아보았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잠깐 짚고 넘어가보자. 

 

정치 뉴스 :

단편적인 사건만을 무작위적으로 나열할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의 단편을 보여줄 수 있는 큰 맥락을 설정하고 그러한 흐름과 세부적 사항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야한다. 이를 통해 복잡한 사회적 역학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내고 나아가 사회의 개혁을 지적으로 환기시키는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동시에 수용자들이 무기력함에 빠지지 않고 개혁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개혁에는 어떤 완고한 한계가 있음을 분노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도록 직시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해외 뉴스 :

외국의 생활상을 전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공감하고 동일시하는 능력을 가로막기도 한다저널들은 문제점이 '무지'가 아닌 '무관심'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단순한 정보 전달에 앞서 수용자들을 보다 뉴스에 몰입하도록 유도해야한다. 이를 위해 해외 뉴스는 기행문학의 기법을 일부 차용하고 포토저널리즘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마음속으로부터 타자를 인격화하도록 돕고 나아가 전 세계에 만연한 배타적 편협함을 극복하는 것에도 큰 공헌을 해야할 것이다. 

 

경제 뉴스 :

수용자에게 경제뉴스는 주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필연적으로 경제 뉴스는 복잡하고 방대한 경제 현상들이 단순한 수치와 어려운 용어들로 정제되어 압축해서 표현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방식은 여러 위험성을 내포한다경제지수와 용어의 사용은 언론에게는 보도의 편리성을 증대시켜 주겠지만수용자에게는 현상 자체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만큼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좌절을 맛볼 지도 모른다. 따라서 저널은 경제 뉴스의 수용자는 '투자자'뿐만이 아닌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모든 구성원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궁극적으로는 단순한 경제지수로 표현되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물이 산출되기까지의 원인/과정/노력/노동 등의 실질적인 활동을 뉴스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셀러브리티 뉴스 : 

오늘 날의 셀러브리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지나칠 정도다. 물론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로부터 대리만족이나 교훈 등을 얻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욕구이다. 하지만 오늘 날 셀러브리티에 대한 관심은 마치 속 빈 강정과도 같은 면이 있다. 그것은 오늘 날의 '관심'을 구성하는 속성들이 친절함과 존경으로 이루어진 양질의 것들이 아니라, 시기/질투나 명성의 부재/공허함 등에서 오는 반대급부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지만, 그를 진심으로 존중/존경하지 않는다. 결국 이를 보도하는 저널과 수용자 모두가 명성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치유제는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러한 감정이 투명하게 표현되는 것이라는 점이 명심하는 수밖에 없다.

 

재난 뉴스 :

재난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무기력함을 느낀다. 그리고 범죄 뉴스를 통해서는 더럽고/참혹하고/잔인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며 침체된다. 현재 이러한 부정적인 뉴스들은 '자극적'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단순한 가십거리로 활용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뉴스들을 통해서 우리는 오만하고 독선적이 되기보다는 두려움과 동정심을 가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무기력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내가 피해자가 아닌 것에 감사하고, 그러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일상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지혜가 수용자들에게 필요하다. 

 

소비자정보 뉴스 :

우리가 소비자정보 뉴스와 광고에 더욱 집중하고 소비를 하게 되는데는, 필요보다는 소비를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인 경우가 많다. 과연 사물을 소유함으로 해서 우리의 본질이 바뀌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보다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소비자정보가 자본주의에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러한 유용성을 살림과 동시에 소비를 통한 행복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내용의 요약이다. 하지만 위의 내용에는 오늘 날 뉴스가 가진 구체적인 문제점들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우리가 뉴스의 시대를 갈아가는데 필요한 태도나 마음가짐 등에 대한 서술은 부족하다. 책에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내면으로부터의 뉴스'라는 별도의 챕터를 만들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분량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나는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뉴스의 홍수 속에서 우리 내면에 귀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로인해 주체성을 지키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플라톤은 어떠한 역사적인 정보나 문학, 그리고 예술 등을 진리를 교란할 수 있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즐기고 활용하는 것은 경험이 많은 철인(철학자)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와 정보들, 문학, 예술 등이 완전한 진리의 모습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 '카타르시르(내면의 관장)'을 받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플라톤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지지한다.

 

다만 하나의 문화나 컨텐츠가 인간 내면의 치료제로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친 검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고전문학, 고전미술, 고전영화, 고전음악 등 고전이 꾸준하게 명작으로써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 시대를 포괄하는 어떠한 울림을 주는 것은, 컨텐츠 자체가 가진 인간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기본이 되겠지만 덧붙여 오랜시간동안 충분한 검증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시간을 통한 검증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긴 시간동안 시대가 변하고 상황과 생각들이 바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은 변하지 않는다. 즉, 가변적인 상황적 요소와 불변의 내면적 요소가 어떤 상황에서도 잘 조화되어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 훌륭한 고전이고, 진정한 내면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오늘 날의 뉴스는 어떠한 문화현상이나 컨텐츠보다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동시에 과거에 예술/역사/문학 등이 해내던 부분을 대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뉴스가 단순한 정보활용을 넘어선 하나의 내면의 치유제나 학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뉴스가 가진 신속함/속도라는 숙명적인 속성 때문인 것 같다. 현재의 뉴스가 빠져있는 함정은, 스스로의 가치가 오직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얼마나 신속하게 있는 그대로 전달하느냐'로 결정된다고 착각하는 것에 있다. 마치 이것은 뉴스의 의미를 오직 가변적 요소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우리는 새로운 것은 중요하다고 즉각 가정하곤 한다하지만 뉴스가 지배하는 시대에 온전한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새로움과 중요함은 그 범주가 겹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정보전달의 방향이 소통이 아닌 일방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사고능력과 인내심자신만의 이상타인에게 전해줄 수 있는 소중한 하나의 무언가조차 상실시켜버린다따라서 뉴스의 정보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며뉴스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는 사실 상 없다고 알아채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다.

 

'객관성'이나 '신속성', '다양성'의 요건들이 뉴스를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대는 변해도 수용자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용자는 언제나 대중, 그리고 인간이다. 대중의 수용능력을 초과한 신속함은 오히려 몰입에 방해를 줄 수 있으며, 이러한 풍조가 확산되면 뉴스는 하나의 가십거리 정도의 평가절하를 당할 수밖에 없다. 이미 뉴스가 하나의 중요한 사회 요소로 간주되고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내면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외부 요소와 조화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뉴스가 고전문화처럼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하나의 문화 컨텐츠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간동안의 검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뉴스 자체가 뚜렷한 컨셉을 지속적으로 견지할 필요가 있겠다. 전달하는 저널은 상대적으로 속도나 양보다는 수용자의 입장을 보다 고려하여 지나치게 객관적인 서술보다는 문학의 서술법을 빌려 더욱 몰입감을 줄 수 있도록 한다던지, 단편적인 사건만을 나열할 것이 아니라 맥락을 짚어주는 맞춤형 보도 등이 필요하다.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뉴스의 대상을 대하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정보는 외부적인 요소일 뿐 실질적으로 삶을 구축하는 것은 그러한 정보들을 활용한 '나' 스스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밀려오는 해일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그런 뉴스와 정보의 파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파도에만 신경쓴 채 자신의 위치도 모르고 막연히 흘러가버리는 것도, 무작정 자신의 위치만을 고수하며 파도를 무시하는 것도 모두 올바른 생존법이라 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 '적절히' 가 아닐까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해야할 최선은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적 흐름과 우리 내면의 주체성을 지키는 선에서의 적절한 조화를 이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높은 파도 위에서 서핑보드를 타며 즐길 수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뉴스는 세상사를 그저 보도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진 못하지만대신 지극히 뚜렷한 우선순위에 의거한 새로운 세상을 우리 마음속에 공들여 짓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간다.

 

 우리는 누가봐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개개인의 입장에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기사들과 일상적으로 마주친다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언론들이 제공하는 이른바 진지한’ 정치 기사들로 인해 유발되는 가장 흔한 감정은 지루함과 당혹스러움이리라. (중략독자를 긴 이야기 속 아무데나 빠뜨렸다가 다시 재빨리 꺼내면서도 사건이 전개돼온 더 넓은 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언론이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기사화할 때 상습적으로 벌이는 일이다 – P.25 

 

 혼란스러움이 야기할 위험을 고려할 때무엇보다 필요한 건 훌륭한 이정표다. (중략진지한 관심을 이끌어내느냐 그러지 못하느냐는 기사 내용들이 그보다 큰 범주의 주제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에 달려있다. – P.29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기술이다특히나 민주주의에서는 언론이 이런 역할을 수행할 때 우리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언론은 민주주의의 보증인이다. (중략뉴스가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통해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관심을 모으는 데 실패할 때사회는 자신의 딜레마를 붙들고 고심하는 일에 위험할 정도로 무능해지고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선하려는 대중의 의지도 결집될 수 없다. – P.34

 

 뉴스와 오랜 시간을 보낼수록 몹시 익숙해지게 될 두 가지의 감정은 두려움과 분노다그것은 뉴스가 잔인하게도 원근감에 대한 우리의 나약한 지각능력을 악용하기 때문이다여기서 원근감이란 공시적/통시적으로 누가봐도 충격적인 사건을 역사 전체에 걸쳐 인류가 겪은 경험과 비교하는 능력을 말한다. – P.59

 

 뉴스 기사는 다른 식으로 깊이 상상하려는 우리의 의지뿐 아니라 그 능력까지 축소하는 방식으로 사안들을 특정한 틀에 가두려는 경향이 있다이것은 하나의 권위로 작용한다만약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이가 없다면불확실하지만 잠재적으로는 중요한 개인들의 사색은 위축되고 말 것이다 P.88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외 뉴스는 예술의 몇 가지 기교들을 기꺼이 채택해야 한다조지 엘리엇이 말했듯매체로서의 예술은 “경험을 증폭하고우리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넘어서는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장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그로 인한 가장 큰 이점은 ‘공감 능력의 확장’이다간단히 말해이것이 해외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우리와 ‘별개의 문제인 것에 주목하도록’ 애씀으로써 우리와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의 만남을 상상하고 실질적인 원조를 하며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P.102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우리의 한편에는 거대한 규모의 풀기 힘든 숙제들과 씨름하는고도로 복잡한 사회과학의 성과에 대한 보도로 점철된 뉴스 의제가 있다이 뉴스는 주기적으로 비관적이고 체념한 듯한 보고를 전한다그리고 한편에는 불완전하고 순진하고 순수하고 열정적이지만 강력한 이런저런 소망이 있다.  P.156

 

 기자들은 숫자 뒤에 감춰진 세상을 보아야 하고자본주의를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으로 인식해야 하며오싹할 정도로 질서정연한 사무실과 제조 시설의 살균된 아름다움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P.169

 

 언론이 좀 더 친절하다면타인이 거든 승리를 그저 신비롭고도 당연한 사실로 묘사하기보다는그들이 승리하기 위해 어떤 걸 쏟아부었는지 정확히 분석하는 데 막대한 힘을 들일 것이다. (중략동시에 뉴스는 통계적 현실을 일깨움으로써 우리가 성공에 대한 현실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한다. – P.199

 

 험담을 늘어놓고 싶은 충동과 명성에 대한 욕망은 똑같은 아픔에서 비롯한다. 모두 관심의 결핍에 기인한다. – P.211

 

 전근대사회 사람들은 시간을 바퀴라고 생각했다그때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주기가 있었다시간을 화살보다는 바퀴로 간주하는 사회는 15분마다 기사를 검색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는다우리의 미래에 대해 인내심이 줄어들었고더 낙관적으로 변했다. – P.252

 

 예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우리 내면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소중한 순간에만 진정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데문화 저널리즘은 바로 이런 순간들을 알아내고 알릴 수 있도록 지성을 갖춰야 하고그러면서 인류가 가진 가장 강력한 치유제를 조제하는 약사의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 P.273










001  뉴스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뉴스의 시대 1편]

002  뉴스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뉴스의 시대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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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뉴스를 보면서도, 실제로는 보지 않고 살았던지도 모르겠네요.

리뷰는 어떠한 상업적인 의도 없이 자율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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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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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알랭 드 보통 저 / 문학동네 출판

뉴스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실은 몇 일전에 있었던 제 7기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단에 지원을 했었다. 물론 요즘 정신이 없는 통에 접한 소식이라 완전히 집중을 못한 것도 있고, 그동안 블로그를 조금 소홀했던터라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작성해서 지원하고 발표일을 기다렸더랬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설레고 조마조마한 그 마음을 간만에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아쉽게도 결과는 낙방. 다음해를 노려봐야겠다 싶다.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단에 지원할 때 작성해야 할 서평은 두 이었다. 그 중 한 편은 이동진 씨의 [밤은 책이다]를 쓰기로 하고, 작성을 거의 마무리하려는 찰나였는데 그 다음 날 그 책이 '오늘의 책'에 선정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제출할 서평에는 '오늘의 책에 선정되지 않은 책'이라는 조건이 붙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을 골라 급히 서평을 작성해야만 했다. 그 때 눈에 띈 책이 바로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이다.

 

물론 결과론 적인 이야기지만,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니 이 책은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단 지원서에 쓰기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책인 것 같다. 왜냐하면 지원서는 단 1500자 내의 글로 정리를 해야했기 때문. 오늘 날 사회의 여러분야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뉴스'라는 방대한 현상에 대해 분석하는 책을 단 1500자로 요약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정단에도 떨어진 마당에 기왕 쓴 서평을 길게 풀어서 이야기해보자는 심정으로 이 포스팅을 작성하고 있다. 미리 말해두자면,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 서평의 경우에는 두 개의 포스팅으로 나눠 쓸 예정이다. 첫 편에서는 최대한 많은 내용을 넣어서 이야기할 것이고, 두 번째 편에서는 간략하게 핵심만 요약해서 이야기할까 한다. 따라서 긴 글을 읽기가 불편하신 분들은 두 번째 편(링크)만 보셔도 충분하실 것 같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책에 내용에 집중해보자. 

 

아침에 일어나 하는 일을 떠올려보자. 세수/양치와 더불어 신문을 가져오거나 TV를 틀어 각종 매체를 접하는 장면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콩나물 시루 같은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조차 사람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뉴스기사를 검색하며, 운전자들도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듣는다. 이처럼 뉴스는 목적을 가진 행동을 넘어서 마치 하나의 습관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만큼 오늘 날의 언론과 뉴스가 차지하는 역할과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며 실제로 직간접적으로 수용자의 가치관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뉴스가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형식적/습관적으로 뉴스를 수용하게 되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뉴스의 중요한 의미들을 무심히 넘겨버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다. 이정도의 영향력이라면 뉴스를 마치 학문의 영역처럼 받아들일 법도 한데, 학문은 고사하고 체계적인 수용법을 익히려하지 않는 것이 의외일 정도다. 저자는 오늘 날 뉴스를 전하고 대하는 것에 숨겨진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뉴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의 올바른 수용법을 알려주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뉴스를 상황별로 분류하고 각각의 수용법 및 언론이 내포한 문제들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된다.

 

먼저 알랭 드 보통은 오늘 날 뉴스정보가 넘쳐나면서 현대인들이 마치 억지로 사육을 당하는 것처럼 정보를 섭취하고 있는데, 소화시키지 못할 만큼의 정보를 왜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원인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과 그것이 누적되어 만들어내는 공포 에 기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이.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이상적인 방법은 무지에서 오는 불확실성 자체를 차단하고 모든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며, 남은 유일한 방법은 내면의 시선을 공포로부터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것 밖에 없다. 우리가 뉴스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뉴스는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불특정영역의 사건을 자극적이고 심각하게 다루고 있고, 수용자들은 그런 (자신에겐 해당되지 않는) 심각한 문제들을 보면서 일시적인 위안과 쾌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그런데 이러한 위안은 말 그대로 일시적이다. 불안의 근본적 원인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보고 듣는 뉴스의 대부분은 순간의 위안을 위해 이용될 뿐, 정보나 지식으로서 누적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뉴스 중 우리에게 보다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선별해서 올바르게 수용하는 능력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것을 이것을 뉴스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와 자기만의 상념에 귀 기울이는 구도자적 훈련이라 명명하고 있다.

 

저자는 뉴스를 전하고 수용하는 올바른 태도를 정치 / 해외 / 경제 / 셀러브리티 / 재난 / 소비자정보 / 내면이라는 뉴스별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분야별 특징을 설명함과 동시에 뉴스가 가진 보편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하고 있다. 아래에서 보다 자세하게 각 분야별 문제점과 저자가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정치 뉴스의 경우 : 

눈을 감고 코끼리의 부분만을 만져서는 코끼리의 모습에 대한 수많은 다른 정의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사건을 전체 맥락이 아닌 작은 부분에만 집중하게되면 본질이 흐려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 날의 정치 뉴스가 가진 맹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의도되었건 의도되지 않았건 간에)사건을 조각조각 내어 단편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뉴스가 말하는 핵심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문제에 대한 몰입도와 재미를 잃고지루해하는 것이다민주주의 하에서 대중이 문제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은 치명적이다특히나 이러한 문제가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치 영역이라면 그 심각성은 더해진다.

 

사실 언론이 희망하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니다언론은 문제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으며 실제로 그것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악을 해결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심어줄 뿐이며, 우리는 그러한 정보의 늪에서 길을 잃고 있다. 결국 정치 뉴스에 관한 언론의 가장 올바른 역할은 사안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확실히 알려주는 것 밖에 없다.

 

이 방법에 대해 저자는 과감한 대안을 제시한다언론이 저널리즘의 함정에 빠져 객관성에 갇혀있는 것이 문제라면 그 대척점에 있는 편향의 요소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에 대해 정면으로 배치되는 '편향'의 도입을 통해 사실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의견그리고 전체적인 태도 등을 피력함으로써 비로소 뉴스는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이다게다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결정효과가 집단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가정하면뉴스가 만들어낸 개선의 이미지들이 긍정적인 미래를 건설하는 쪽으로 사회를 흘러가게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동시에 언론이 뉴스의 역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뉴스의 역설이란현실의 문제를 밝혀내면서 그 원인이 특정 인물에 있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말한다이러한 행태는 시스템의 개선을 통한 동일한 문제 억제의 선순환을 가져오지 못한 채같은 문제를 반복할 뿐이다물론 부정한 인물에 대한 분노는 희망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해외 뉴스의 경우 :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가 해외뉴스에 관심(몰입)을 보이지 않는 것은사안 자체가 지루하거나 대중이 우둔해서가 아니다오히려 문제를 전달해주는 언론의 전개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현재의 언론은 대중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무지’라고 진단하고 있다그래서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저널리즘의 최선이 ‘많은 정보를 정확히 모으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현재 대중들이 앓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지’가 아니라 ‘무관심’이다어떤 뉴스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설령 그 문제가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쉽게 개선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대그리고 미래의 언론들은 대중이 기본수준 이상의 삶에 대한 사전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 전제 하에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사를 써야만 할 것이다공감은 그것을 우리의 일상으로 느끼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며그러한 동질감 하에서만 우리는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얻어낼 수 있다

(공감 -> 관심 -> 현실문제에 대한 참여 -> 변화/개선)

 

만약 언론이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대중의 관심을 일으키는데 힘을 쏟고자 한다면 예술에 기반한 어떤 기술적인 면을 보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상상의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도를 가진 적절한 사진’등의 영상매체를 동반한다면 수용자가 사건이 스스로에게서 멀리 떨어진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경제 뉴스의 경우 :

경제뉴스는 오늘 날 가장 중시되는 분야 중 하나로 우리가 가장 여과없이 수용하는 뉴스 분야에 속한다. 그만큼 정치뉴스나 해외뉴스와 다르게 수용자가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싶어하는 분야의 뉴스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 뉴스는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경제 뉴스의 대부분은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 수치와 용어를 통해 정제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적당한 수준의 요약과 정제는 수용자로 하여금 보다 효율적으로 현상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하지만 경제 뉴스처럼 ‘빠르게 변하고’ ‘복잡한’ 현상에 대해 표현의 용이성을 위해 수치와 용어들이 어쩔 수 없이 사용되는 경우에는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입장에서 그 현상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복잡하고거대하고어려운 경제에 관한 기사와 사안들을 접하면서, 수용자인 우리는 그 정보를 해석하려는 고된 노력에 직면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잘 살고 싶어하고, 그러한 부를 만들어 내는 경제적 원리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크다. 그래서 비록 어려운 문제라 하더라도 경제 뉴스들의 해석을 통해 자신과 세계의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개선 (쉽게 말해서 나와 모두가 부자가 되는)을 꿈꾸며 노력한다하지만 그런 열망들이 이루어진 적이 있는가화가 나는 것은 우리가 어려움을 각오하고 노력했던 만큼의 정당한 보상이나 개선조차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대표적인 경제신문사로 꼽히는 두 신문사의 경제신문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구독해서 보고 있지만지금도 누군가가 경제현상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으냐는 직접적인 질문을 한다면, 곧바로 답을 하기가 곤란할 것 같다그것이 과연 나만의 문제일까내가 둔해서 그런 면도 없진 않겠지만기본적으로 뉴스와 신문이 경제적 현상을 파편화된 사건으로 보도하기 때문에 그러한 어려움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전체적인 흐름에서 함께 파악하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저널은 왜 현상에 대한 전달을 보다 체계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가경제가 워낙 복잡해서 그것을 체계화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거나그게 아니라면 현상유지되는 것에서 얻는 그들의 어떤 이익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볼 뿐이다.

  

그리고 설사 개인이 경제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파편화된 경제뉴스의 조각들을 나름의 지도에 맞추어 해석할 수 있게 된다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정보으로 인식될 공산이 크며, 활용 가능한 지식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경제수치 이면에 내포된 일련의 경제활동(노동소비생산그리고 그것을 뒷바침하는 인간의 활동들)을 상상하며 읽을 수 있는 능력 또한 겸비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 뉴스가 올바르게 전해지고 올바르게 해석되어 올바르게 활용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수용자들은 지금 이상의 거시적인 안목으로서의 경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고, 경제뉴스를 생산하는 주체들은 수용자들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도움을 제공해야할 것이다.

 

 

셀러브리티 뉴스의 경우 :

정치나 해외 뉴스와는 다르게 셀러브리티 뉴스도 경제 뉴스처럼 수용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뉴스에 속한다. 다만 경제 뉴스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수용하려고 하고 노력도 동반하는 것에 반해, 셀러브리티 뉴스는 현실적 필요보다는 하나의 흥미유발 측면에서의 가십거리로써 이용될 뿐이다. 하지만 셀러브리티 뉴스의 본래의 속성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누군가를 존중하고 선망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그리고 그 선망의 대상을 통해 우리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감정들을 자신과 사회의 발전에 교육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관심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셀러브리티에 대한 뉴스를 하나의 교재처럼 이용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셀러브리티 뉴스인 것이다.

 

셀러브리티 뉴스가 단순한 가십거리가 아닌 존중의 의미를 담은 뉴스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셀러브리티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들이 필요하다. 1) 첫 째, 수용자가 먼저 존경할 대상의 물색을 신중하고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고 2) 셀러브리티의 모습을 전하는 언론 역시 보도 내용을 선별해야만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전제가 선행되려면 '인터뷰 주체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혹은 '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만 한다' 라는 생각이 먼저 퍼져야만 한다.그러나 불행히도 셀러브리티를 대하는 현재의 언론은 성공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타인의 성공 사례를 제시하는 것으로 셀러브리티를 활용하는 것이 전부라는 뜻이다수용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성공사례는 나 역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주기도 하지만오히려 역으로 시기심을 동반한 좌절감을 안겨주는 부분이 더 클지도 모를 일이다.

 

시기심은 배척되어야 할 비도덕적 감정으로 치부되곤 하지만사실 차이를 인식하여 변화와 발전의 동기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감정이기도 하다그렇다면 언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은 이러한 시기심을 긍정적 동기로 바꾸는 것이다그 과정은 누군가의 성공 결과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그 성공이 이루어진 과정과 원인들에 대해서 명확히 제시할 때만 가능해질 수 있다인간은 구체적일수록 현실적이라 믿기 때문이다동시에 그 성공과정과 결과물이 언제나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통계적으로 매우 극소수만 성공할 수 있음을 인지시킴으로써성공에 대한 현실감각을 유지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한편 셀러브리티 뉴스의 활용측면이 아닌 스타에 주목하는 사회적인 현상 자체를 바라봤으면 한다. 스스로가 셀러브리티가 되고 싶어하고셀러브리티에게 관심을 가지고그것을 평가하고 시기하는 것 모두 관심’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관심은 상대방에게서 내게 전해지는 것이니만큼 내가 그 속성을 결정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명성있는 사람들이 보다 품격있는 관심을 원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그리고 관심/인기가 생김에도 오히려 더 공허함을 느끼는 것도인기있는 사람을 시기하고 헐뜯는 일부 대중들도 모두 관심의 결핍과 그것이 가진 속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확실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다만 이 시대에서 이뤄지기 극히 어려운 상호 간의 진심으로 우러나는 품격있는 관심이 통하는 사회가 되는 것뿐이라고 포괄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다.

 

 

재난/범죄 뉴스의 경우 :

재난이나 범죄를 다루고 있는 뉴스의 경우에는 대단히 자극적인 소재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끈다는 면에서 중요하게 보도되는 분야이다. 서평의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보면서 불안감을 느낀다. 자연재해에 관련된 뉴스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개인의 힘으로 사건을 바꿀 수 없다는 일종의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피해자는 아니다'는 사실로부터 안도감과 겸손함을 얻기도 한다. 자연재해 자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뉴스의 메세지를 동전의 양면처럼 받아들임으로 해서 일상의 삶에 보다 충실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긍정>부정'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한편 범죄 뉴스의 경우도 비슷하다. 주의할 점은 사건의 진행과 결과와는 별개로, 한 인간이 판단되어지는 것은 사건의 서술 방식에 크게 의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다시 말하면,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범죄 뉴스를 대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같은 인간임을 지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범죄 뉴스를 보면서 쾌락을 느낄 것이 아니라, 왜 가해자는 인간성을 져버리고 그런 상황이 되버릴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타산지석의 태도로 임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만 한다.

 

 

건강/소비자정보 뉴스의 경우 :

'신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이나 '어떤 음식이 몸에 좋고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는 뉴스처럼 우리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뉴스는 없는 것 같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건강(한정된 수명)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그것을 극복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물론 유한성을 지각하고 운명과 수명에 체념하며 살아온 기간이 인류역사의 대부분이었지만,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 본능(숙명)을 극복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희망이 생기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을 뉴스가 더욱 빨리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종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은 우리를 자꾸만 집착하게 만든다. 진시황이 '불로'에 눈이 멀자 몸에 좋다는 말만 들으면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러한 희망은 우리를 뉴스에 신경질적으로 집착하게 만들고 있다.

 

소비자정보 뉴스는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가치창출의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러한 순기능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소비를 통해서 개인의 행복을 살 수 (충족시킬 수) 있다고 믿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게다가 언론에 광고와 같은 상업적인 요소가 개입되면서 효과적인 정보를 제공해야할 본래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소비자는 더 이상 언론과 광고를 신뢰하지 않는다. 다만 소비함으로써 얻는 일종의 만족을 희망할 뿐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소비로 인한 행복은 구매로 인한 목적 만족에서오는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각 뉴스 분야별 문제점과 올바른 뉴스 수용법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의 주장에 덧붙여 내 생각을 정리한 자료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은 일상적인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서 그 본질을 살펴보는 것에는 재능이 있는 작가지만, 그 내용들을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서술하는 작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의 흐름을 이해하고, 때론 방벽을 쌓고, 때론 수영을 배워야만 하는 것처럼오늘 날 뉴스의 홍수 속에서 스스로의 주체성을 유지한 채 정보를 선별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런 면에서 뉴스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만의 방법을 익히고자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어  [뉴스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뉴스의 시대' 2편](링크) 에서는 위의 내용의 개괄적인 정리와 더불어 '내면으로부터의 뉴스' 주제에 맞추어 남은 글을 이어가볼까 한다. 1편의 내용이 홍수 상황에서 각 조류별 수영법을 익히는 연습이었다면, 2편에서는 홍수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가 될 듯 싶다. 덧붙여 발췌한 주요 문장들 역시 함께 포스팅 하도록 하겠다.



001  뉴스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뉴스의 시대 1편]

002  뉴스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뉴스의 시대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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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뉴스를 보면서도, 실제로는 보지 않고 살았던지도 모르겠네요.

리뷰는 어떠한 상업적인 의도 없이 자율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공감은 제게 큰 응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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