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시대』 - 알랭 드 보통 저 / 문학동네 출판

뉴스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앞서 [뉴스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뉴스의 시대』1편](링크) 에서 오늘 날의 뉴스에 산재된 문제점들과, 그것을 올바르게 수용하는 법에 대해서 분야별로 알아보았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잠깐 짚고 넘어가보자. 

 

정치 뉴스 :

단편적인 사건만을 무작위적으로 나열할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의 단편을 보여줄 수 있는 큰 맥락을 설정하고 그러한 흐름과 세부적 사항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야한다. 이를 통해 복잡한 사회적 역학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내고 나아가 사회의 개혁을 지적으로 환기시키는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동시에 수용자들이 무기력함에 빠지지 않고 개혁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개혁에는 어떤 완고한 한계가 있음을 분노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도록 직시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해외 뉴스 :

외국의 생활상을 전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공감하고 동일시하는 능력을 가로막기도 한다저널들은 문제점이 '무지'가 아닌 '무관심'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단순한 정보 전달에 앞서 수용자들을 보다 뉴스에 몰입하도록 유도해야한다. 이를 위해 해외 뉴스는 기행문학의 기법을 일부 차용하고 포토저널리즘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마음속으로부터 타자를 인격화하도록 돕고 나아가 전 세계에 만연한 배타적 편협함을 극복하는 것에도 큰 공헌을 해야할 것이다. 

 

경제 뉴스 :

수용자에게 경제뉴스는 주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필연적으로 경제 뉴스는 복잡하고 방대한 경제 현상들이 단순한 수치와 어려운 용어들로 정제되어 압축해서 표현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방식은 여러 위험성을 내포한다경제지수와 용어의 사용은 언론에게는 보도의 편리성을 증대시켜 주겠지만수용자에게는 현상 자체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만큼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좌절을 맛볼 지도 모른다. 따라서 저널은 경제 뉴스의 수용자는 '투자자'뿐만이 아닌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모든 구성원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궁극적으로는 단순한 경제지수로 표현되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물이 산출되기까지의 원인/과정/노력/노동 등의 실질적인 활동을 뉴스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셀러브리티 뉴스 : 

오늘 날의 셀러브리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지나칠 정도다. 물론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로부터 대리만족이나 교훈 등을 얻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욕구이다. 하지만 오늘 날 셀러브리티에 대한 관심은 마치 속 빈 강정과도 같은 면이 있다. 그것은 오늘 날의 '관심'을 구성하는 속성들이 친절함과 존경으로 이루어진 양질의 것들이 아니라, 시기/질투나 명성의 부재/공허함 등에서 오는 반대급부적인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지만, 그를 진심으로 존중/존경하지 않는다. 결국 이를 보도하는 저널과 수용자 모두가 명성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는 가장 확실한 치유제는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러한 감정이 투명하게 표현되는 것이라는 점이 명심하는 수밖에 없다.

 

재난 뉴스 :

재난 뉴스를 보면서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무기력함을 느낀다. 그리고 범죄 뉴스를 통해서는 더럽고/참혹하고/잔인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보며 침체된다. 현재 이러한 부정적인 뉴스들은 '자극적'이라는 특성을 이용해서 단순한 가십거리로 활용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뉴스들을 통해서 우리는 오만하고 독선적이 되기보다는 두려움과 동정심을 가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무기력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내가 피해자가 아닌 것에 감사하고, 그러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일상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지혜가 수용자들에게 필요하다. 

 

소비자정보 뉴스 :

우리가 소비자정보 뉴스와 광고에 더욱 집중하고 소비를 하게 되는데는, 필요보다는 소비를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인 경우가 많다. 과연 사물을 소유함으로 해서 우리의 본질이 바뀌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보다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물론 소비자정보가 자본주의에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러한 유용성을 살림과 동시에 소비를 통한 행복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난 포스팅에서 언급했던 내용의 요약이다. 하지만 위의 내용에는 오늘 날 뉴스가 가진 구체적인 문제점들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우리가 뉴스의 시대를 갈아가는데 필요한 태도나 마음가짐 등에 대한 서술은 부족하다. 책에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내면으로부터의 뉴스'라는 별도의 챕터를 만들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분량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나는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뉴스의 홍수 속에서 우리 내면에 귀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로인해 주체성을 지키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플라톤은 어떠한 역사적인 정보나 문학, 그리고 예술 등을 진리를 교란할 수 있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즐기고 활용하는 것은 경험이 많은 철인(철학자)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와 정보들, 문학, 예술 등이 완전한 진리의 모습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통해 '카타르시르(내면의 관장)'을 받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플라톤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지지한다.

 

다만 하나의 문화나 컨텐츠가 인간 내면의 치료제로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친 검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고전문학, 고전미술, 고전영화, 고전음악 등 고전이 꾸준하게 명작으로써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 시대를 포괄하는 어떠한 울림을 주는 것은, 컨텐츠 자체가 가진 인간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기본이 되겠지만 덧붙여 오랜시간동안 충분한 검증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시간을 통한 검증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긴 시간동안 시대가 변하고 상황과 생각들이 바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은 변하지 않는다. 즉, 가변적인 상황적 요소와 불변의 내면적 요소가 어떤 상황에서도 잘 조화되어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 훌륭한 고전이고, 진정한 내면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오늘 날의 뉴스는 어떠한 문화현상이나 컨텐츠보다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동시에 과거에 예술/역사/문학 등이 해내던 부분을 대신하고 있다. 그럼에도 뉴스가 단순한 정보활용을 넘어선 하나의 내면의 치유제나 학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뉴스가 가진 신속함/속도라는 숙명적인 속성 때문인 것 같다. 현재의 뉴스가 빠져있는 함정은, 스스로의 가치가 오직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얼마나 신속하게 있는 그대로 전달하느냐'로 결정된다고 착각하는 것에 있다. 마치 이것은 뉴스의 의미를 오직 가변적 요소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우리는 새로운 것은 중요하다고 즉각 가정하곤 한다하지만 뉴스가 지배하는 시대에 온전한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새로움과 중요함은 그 범주가 겹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정보전달의 방향이 소통이 아닌 일방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사고능력과 인내심자신만의 이상타인에게 전해줄 수 있는 소중한 하나의 무언가조차 상실시켜버린다따라서 뉴스의 정보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며뉴스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는 사실 상 없다고 알아채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다.

 

'객관성'이나 '신속성', '다양성'의 요건들이 뉴스를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대는 변해도 수용자는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용자는 언제나 대중, 그리고 인간이다. 대중의 수용능력을 초과한 신속함은 오히려 몰입에 방해를 줄 수 있으며, 이러한 풍조가 확산되면 뉴스는 하나의 가십거리 정도의 평가절하를 당할 수밖에 없다. 이미 뉴스가 하나의 중요한 사회 요소로 간주되고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내면의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외부 요소와 조화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뉴스가 고전문화처럼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하나의 문화 컨텐츠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어느 시간동안의 검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뉴스 자체가 뚜렷한 컨셉을 지속적으로 견지할 필요가 있겠다. 전달하는 저널은 상대적으로 속도나 양보다는 수용자의 입장을 보다 고려하여 지나치게 객관적인 서술보다는 문학의 서술법을 빌려 더욱 몰입감을 줄 수 있도록 한다던지, 단편적인 사건만을 나열할 것이 아니라 맥락을 짚어주는 맞춤형 보도 등이 필요하다.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뉴스의 대상을 대하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정보는 외부적인 요소일 뿐 실질적으로 삶을 구축하는 것은 그러한 정보들을 활용한 '나' 스스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밀려오는 해일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미 그런 뉴스와 정보의 파도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파도에만 신경쓴 채 자신의 위치도 모르고 막연히 흘러가버리는 것도, 무작정 자신의 위치만을 고수하며 파도를 무시하는 것도 모두 올바른 생존법이라 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 '적절히' 가 아닐까 하지만, 결국 우리가 해야할 최선은 뉴스가 넘쳐나는 시대적 흐름과 우리 내면의 주체성을 지키는 선에서의 적절한 조화를 이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높은 파도 위에서 서핑보드를 타며 즐길 수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뉴스는 세상사를 그저 보도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진 못하지만대신 지극히 뚜렷한 우선순위에 의거한 새로운 세상을 우리 마음속에 공들여 짓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간다.

 

 우리는 누가봐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개개인의 입장에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기사들과 일상적으로 마주친다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언론들이 제공하는 이른바 진지한’ 정치 기사들로 인해 유발되는 가장 흔한 감정은 지루함과 당혹스러움이리라. (중략독자를 긴 이야기 속 아무데나 빠뜨렸다가 다시 재빨리 꺼내면서도 사건이 전개돼온 더 넓은 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언론이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기사화할 때 상습적으로 벌이는 일이다 – P.25 

 

 혼란스러움이 야기할 위험을 고려할 때무엇보다 필요한 건 훌륭한 이정표다. (중략진지한 관심을 이끌어내느냐 그러지 못하느냐는 기사 내용들이 그보다 큰 범주의 주제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에 달려있다. – P.29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기술이다특히나 민주주의에서는 언론이 이런 역할을 수행할 때 우리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언론은 민주주의의 보증인이다. (중략뉴스가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통해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관심을 모으는 데 실패할 때사회는 자신의 딜레마를 붙들고 고심하는 일에 위험할 정도로 무능해지고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선하려는 대중의 의지도 결집될 수 없다. – P.34

 

 뉴스와 오랜 시간을 보낼수록 몹시 익숙해지게 될 두 가지의 감정은 두려움과 분노다그것은 뉴스가 잔인하게도 원근감에 대한 우리의 나약한 지각능력을 악용하기 때문이다여기서 원근감이란 공시적/통시적으로 누가봐도 충격적인 사건을 역사 전체에 걸쳐 인류가 겪은 경험과 비교하는 능력을 말한다. – P.59

 

 뉴스 기사는 다른 식으로 깊이 상상하려는 우리의 의지뿐 아니라 그 능력까지 축소하는 방식으로 사안들을 특정한 틀에 가두려는 경향이 있다이것은 하나의 권위로 작용한다만약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이가 없다면불확실하지만 잠재적으로는 중요한 개인들의 사색은 위축되고 말 것이다 P.88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외 뉴스는 예술의 몇 가지 기교들을 기꺼이 채택해야 한다조지 엘리엇이 말했듯매체로서의 예술은 “경험을 증폭하고우리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넘어서는 동료 인간들과의 접촉을 확장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그로 인한 가장 큰 이점은 ‘공감 능력의 확장’이다간단히 말해이것이 해외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우리와 ‘별개의 문제인 것에 주목하도록’ 애씀으로써 우리와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의 만남을 상상하고 실질적인 원조를 하며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P.102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우리의 한편에는 거대한 규모의 풀기 힘든 숙제들과 씨름하는고도로 복잡한 사회과학의 성과에 대한 보도로 점철된 뉴스 의제가 있다이 뉴스는 주기적으로 비관적이고 체념한 듯한 보고를 전한다그리고 한편에는 불완전하고 순진하고 순수하고 열정적이지만 강력한 이런저런 소망이 있다.  P.156

 

 기자들은 숫자 뒤에 감춰진 세상을 보아야 하고자본주의를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현상으로 인식해야 하며오싹할 정도로 질서정연한 사무실과 제조 시설의 살균된 아름다움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P.169

 

 언론이 좀 더 친절하다면타인이 거든 승리를 그저 신비롭고도 당연한 사실로 묘사하기보다는그들이 승리하기 위해 어떤 걸 쏟아부었는지 정확히 분석하는 데 막대한 힘을 들일 것이다. (중략동시에 뉴스는 통계적 현실을 일깨움으로써 우리가 성공에 대한 현실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만 한다. – P.199

 

 험담을 늘어놓고 싶은 충동과 명성에 대한 욕망은 똑같은 아픔에서 비롯한다. 모두 관심의 결핍에 기인한다. – P.211

 

 전근대사회 사람들은 시간을 바퀴라고 생각했다그때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주기가 있었다시간을 화살보다는 바퀴로 간주하는 사회는 15분마다 기사를 검색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는다우리의 미래에 대해 인내심이 줄어들었고더 낙관적으로 변했다. – P.252

 

 예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우리 내면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소중한 순간에만 진정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데문화 저널리즘은 바로 이런 순간들을 알아내고 알릴 수 있도록 지성을 갖춰야 하고그러면서 인류가 가진 가장 강력한 치유제를 조제하는 약사의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 P.273










001  뉴스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뉴스의 시대 1편]

002  뉴스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뉴스의 시대 2편]

 

 

 

 

 

Copyright ⓒ 2014. by 비틀즈. All Right Reserved.

매일 뉴스를 보면서도, 실제로는 보지 않고 살았던지도 모르겠네요.

리뷰는 어떠한 상업적인 의도 없이 자율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공감은 제게 큰 응원이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