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리니름 많이 있습니다. )
'시속 300km, 멈추면 터진다!'
이 카피에서 나는 <스피드>의 향기를 느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퀵>은 카피처럼 <스피드>를 대놓고 베낀 영화가 아니었다. <퀵>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시속 300km, 멈추면 터진다!'가 아니라 '제한시간 30분, 폭탄을 배달하지 못하면 그녀가 죽는다!'이다.
줄거리 : 전직 폭주족 현직 퀵배달원 최한수는 정체불명의 남자의 협박에 의해 폭탄을 곳곳에 배달하게 된다. 제한 시간 내에 폭탄을 남자가 말하는 곳에 전해주지 않으면, 뒤에 탄 전 여자친구이자 현 아이돌인 아롬(춘심)이 쓴 헬멧이 터지게 되는데.......
<퀵>을 보는 내내, 감독도 배우도 이 영화를 찍느라 정말 고생했겠다는 생각을 했다. <퀵>은 정말로 액션의 강도가 세다. 폭탄이 터지고, 오토바이가 달리고 뛰어넘고 넘어지고, 자동차가 달리고 구르고 터지고...... 보는 사람이야 즐겁지만 가끔은 보다가 걱정이 될 정도다. (나중에 엔딩크레딧을 보니 촬영 중 실제로 다리부상을 당해 입원한 분이 나온다.)
내가 보기에 <퀵>은 정말로 열심히 찍은 영화고, 그래서 나는 <퀵>의 흥행성적이 좀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퀵>에 높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겠다.
<퀵>에 강도 높은 액션이 빵빵 터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액션들은 마치 '아 감독은 이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구나.'라는 느낌이 드는 멋진 액션 장면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느낌이 든다. 이 영화에는 빵빵 터질 만한 개그 장면도 많지만, '아, 이 개그를 치고 싶었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개연성이 '상당히' 부족하다. 그 어떤 훌륭한 액션도 탄탄한 스토리 위에 있어야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한기수가 경찰에게 쫓기며 인천공항으로 향할 때 도로에서 '우연히' 앞에 있던 LPG가스운반트럭의 운전수가 '우연히' 졸다 '우연한' 사고로 LPG가스통이 굴러 떨어져 사고가 나는 장면을 보라. 그 액션은 멋있었지만 정말 뜬금없었다. 차라리 한기수가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서 '앞에 가던' LPG가스통을 도로에 떨어뜨린다면 납득이 갔을 것이다.
한기수는 어떤 놈인가? 나는 이 놈이 아주 이기적이고 나쁘고 제 몸 챙길 줄만 알고 제 생각만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인 8.15.폭주의 모습이나, 과거 회상 장면에서 다른 폭주족들을 대할 때, 그리고 명동에서의 추격씬, 자신이 배달할 물건이 폭탄이라는 것을 알고난 뒤의 반응, 옛날에 저지른 일을 죄책감을 가지긴 커녕 기억도 못하고 있을 때 등을 종합해볼 때, 다른 판단을 하기는 좀 힘들다.
그러나 좀 이상한 것이, 한기수가 내가 판단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를 장기판의 말로 사용하는 협박범에 대한 분노, 자기 것을 건드린 협박범에 대한 짜증 등이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틈틈히 협박범의 손을 벗어나서 협박범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아예 아롬을 포기하고 그냥 제 갈길을 가지 않을까(악당에게도 순정은 있다고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내가 판단한 기수는 상당한 이기주의자다). 그러나 한기수는 "니 나에게 와 이러는데? 내가 니에게 머라도 했나? 아 진짜 미치겠네. 그냥 확 죽여삐라!"라고 말만 할 뿐, 순순히 협박범의 말에 따르며 협박범이 자신을 놓아주기만을 바라고 자신보다 아롬의 안위를 챙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협박범이 휘두른 하나의 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한기수가 '이기적인 악당'이라면 그냥 '악당'다운 모습으로 밀고 나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한기수가 악당이라고 해도 협박범이 더 나쁜 놈으로 나온다면 자연히 한기수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그렇지만 협박범이 한기수를 선택한 이유가 밝혀지고 나면 한기수가 더 나쁜 놈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비단 한기수만이 아니다. 아롬은 폭탄이 자기 머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도 콘서트장으로 가자고 닦달하지만, 그런 '프로'의식은 막상 콘서트장에 도착한 이후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는 사고를 치고, 스케쥴을 무시하고(사정 설명을 할 생각도 않고 뒷일도 생각 않고) 한수와 도망친다. 그렇다면 애초에 왜 콘서트장은 갔을까? 그리고 아롬이 한수 대신 헬멧을 쓸 것을 협박범은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순전히 사고였는데 왜, 아롬이 쓴 헬맷과 최한수가 찬 팔찌가 일정 범위 이상 떨어지면 죽는다는 설정이 있을까?; 그 사이에 프로그램을 짜넣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부분이 꽤 많이 보인다.
명식의 후배 폭주족들은 왜 등장했는가? 그들은 전혀 활약이 없다. 나는 그들이 한 번이라도 최한수를 궁지에 몰거나, 혹은 의외의 상황에서 등장해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봤지만, 그들은 전혀 활약하지 못하고 잊혀진다.
왜 갑자기 협박범은 제 3의 인물과 통화하며 한강다리가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을까? 협박범은 1. 돈이 필요했고. 2. 최한수가 미웠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 따라서 협박범의 행동은 굉장히 번잡하고 의미없어보인다. 최한수를 폭탄테러범으로 몰아 사회적으로 매장할 생각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단순히 돈을 주지 않았다는 걸로 폭탄테러를 그렇게 여러번 일으킨다는 건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결국 협박범은 최종보스와 만났을 때 돈을 받지도 않는다). 협박범 나름의 내러티브가 작가 안에는 있을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은 보여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 감독은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퀵> 안에 담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한기수가 경찰을 따돌리고 제한 시간 내에 폭탄을 배달하려고 움직일 때 나오는 '액션', 한기수를 협박하는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내는 경찰의 '미스터리 수사극', 한기수와 아롬과 명식의 연애와 연관된 '트렌디코믹드라마',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협박을 받으면서 벌어지는 '심리 스릴러' 까지. 하나가 주고 다른 게 부였다면 꽤나 풍부한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이들은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퀵>을 보는 내내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퀵>에서 제일 공을 들인 것은 액션이만큼, 액션이 살도록 이야기의 얼개 정도는 단순명확하면서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었다면 더 즐겁게 액션을 볼 수 있었을 듯하다.
혹평을 잔뜩 늘어놓은 것 같은데, <퀵>을 볼 때는 재미있게 봤다. 이것저것 시원하게 날려버리다 보니 스트레스가 빵빵 풀린다. 다만 저 정도로 공을 들인 액션을 이야기가 받쳐주지 못한다는 게 안타깝다. 더 멋진 영화가 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덧붙임.
액션이 강점이지만, 8.15 폭주와 명동 추격씬은 좀 싫었다. 8.15.폭주 같은 경우 몇중 추돌사고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고가 났는데, 교통사고 피해를 당해본 적 있는 내 입장에서 가해자가 정말 때려죽일 놈들로 보인다. 그리고 명동에서는 거리 안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온 사람에게 시달린 경험이 다수 있다보니 액션이 스릴있고 짜릿하다기보다 싫은 기분이 먼저 들었다.
덧붙임 2.
팔찌와 헬멧이 떨어지면 폭발한다는 설정은, 한기수가 팔찌를 멀리 던져버릴까봐 해 놓은 설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