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를 가진 나는 유한한 생명을 지녔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함이 계속될 듯느껴진다. 나는 끝나지 않을 내 정신의 무한을 생각한다. 지상에서 살지만, 영원을 추구하는 나의 의식. 나는 홀로생각을 통해서 세계 전체를 한순간에 움켜쥘 수 있을듯싶다. 하지만 내가 사유하고 그에 따라 계획하고 어떤목적을 의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행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매 순간 세상과관계 맺고 선택을 해야 한다.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홀로살아가기가 아니다. 사실상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혼자서 살아가기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17쪽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남다른 악마성을 지녔기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수행하는, ‘사고력을 결여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사유를 그저 원래부터 주어진 것으로 여기거나계산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유는 다른 이와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인지하는 것이며, 비판의 능력이다. 아렌트는 이러한사유에 의지해 사실을 탐구하면서 진실을 바로 보고자했다. 31쪽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심사숙고하는(réfléchir) 것이다. 그리고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건 비판적으로검토할 대상이 된다. 즉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위험천만한 사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유가 위험하다는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사유하지 않는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하겠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312쪽.
제인 에어는 오랫동안 가부장제하에서 여성의독립과 여성의 성장 서사를 다룬 작품으로 높이평가되었다. 그러나 스피박은 진 리스의 광막한사르가소 바다를 독해하면서 『제인 에어』의 서사에 문제를 제기한다. 『제인 에어』의 서사는 버사를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상에 있는 인물로 묘사하면서, 제인을 야만성을 극복하는 로체스터의 구원자로 등장시킨다. 『제인 에어』에서 앙투아네트(버사)는 로체스터의 몰락을 가져오고 제인을 내적 성숙에 이르게 하는 장치로 쓰일 뿐이다. 『제인 에어』에서 버사는 야만성과 동물성의 영역에 머물며, 서구의 문명에 대립하는 비서구의 야만으로 그려진다. 그저 미친 여자로 남아버린 비서구인 앙투아네트, 그는 말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생각했다. 그러나 스피박은 앙투아네트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버사는 내 이름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나를 부르는 것은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만들려는 거지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어서 그는 벵골과 콜카타의 거리에서 달린다. 그러한 스피박을 징벌하려고 거칠게 욕하고 무례하게 침 뱉는 남자들에게, 똑같이 욕하고 침을 뱉고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자신을 제3세계 여성이라고 분류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세계를 1세계라 칭하지 말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스피박은 자기의 언어로 말하기 위해,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과 더불어 목소리를 높였다.
『로빈스 크루소]에서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는보이지 않으며, 그의 목소리로 발화하는 순간은존재하지 않는다. 크루소는 프라이데이라 불리는존재에게 자신의 말을 가르치고, 복종을 이끌어내며, 충성을 약속받는다. 서구의 문명을 훌륭하게 이식받은충성스런 프라이데이는 서구의 상상이 만들어낸 선한타자의 환상이며, 서구인에 의해 상상적으로 구성된타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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