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보지법비롯한 정신건강 관련 법체계는 지금까지 정신장애인 개개인의 이야기에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특히 입원 결정과 관련된) 의사의 진단은 철저히 정신의학적 증상의 경중, 자신과 타인에 대한 해악 가능성을 분별하는 데 집중되었다. 설사 강제입원 요건에 해당하는정신의학적 증상을 보이더라도 환자 개인의 이야기는 복잡하고 풍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법체계는 의사의 진단‘을 곧 강제입원 및 치료라는 강력한 조치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지위로 삼는, 이른바 지위 접근status approach 방식을 택하여 정신장애인의 자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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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고유성을 간편하게 억압한다.
이것이 정신장애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장애인거주시설에서 27년간 살다 독립해 자기 집에서 살게 된 중증 뇌성마비장애인 송국현은 국민연금공단 심사를 거쳐 「장애인복지법 상 장애등급 3급을 받았다. 2014년 당시 3급에 해당하는 장애인은 일상생활과 신변 처리를 도와주는 ‘활동지원인‘을 신청할 자격이 없었다. 송국현의 장애등급심사를 진행한 의사는 그가 뇌성마비로 인해 팔다리의 기능이 크게 저하된 상태이지만 ‘충분히’ 저하되지는 않았다고 판정했다. 2014년 4월 송국현이 집에 혼자 있을 때 불이 났는데, 그는 활동지원을 받을 만큼 충분히 저하되지 않은 팔다리로 탈출할 수가 없어 심한 화상을 입고 며칠 후 결국 사망했다. 187p

뉴욕대 로스쿨 교수 켄지 요시노Kenji Yoshino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중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同化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커버링covering‘ 압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생리나 출산 등)을 티내지 말 것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직 문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장애로 인한 특성을 숨기기를 원하는 사회 분위기같은 것이 그 예다. 199p

"저희에게 모욕을 주시면 받겠습니다. 길을 가다 때리셔도 맞겠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장애아들에게도교육받을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부모들은 모욕을 감수하고 무릎을 꿇은 채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읍소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큰 소리로 외쳤다.
"쇼하지 마!"
이렇게 거침없이 소리치는 이들,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누구보다 노련한 이 사람들은 자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필요한 만큼 자신을 적절히 연기할 것이다. 국회의원 앞에서는 설립을 반대하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고, 집단이 모인 토론장에서는극도의 분노를 부추기며 소리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 무릎을 꿇는 행위는 ‘쇼‘, 즉 퍼포먼스일 뿐이다.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완전히 일치하여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생각할 여유도 없는, 즉 성찰이 불가능한 상황을 이들은 경험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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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작용에 ‘노련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부재하다. 이들은 언제나 자기를 관찰하고 통제하고 연기해왔기 때문에, 무릎 꿇은 부모들처럼 자신을 관찰하는 시야가 사라지고 다른 존재, 대상, 목표를 위해서만 의식이 정향된 몰입의 순간을 경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모들의 습소와 자신들의 분노는 연극 무대 위의퍼포먼스 대결일 뿐이다. 그래서 반대 측 대표도 무릎을 꿇는다. 페포먼스 경쟁에는 수치심이 들어서지 않는다. 실존을 위협하지 않기때문이다. 그 순간 자아는 요새 안에 숨고, 자신이 연출한 캐릭터들이 게임 속에서 경쟁하듯 다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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