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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에게 완벽한 여자는 없다
시노다 세쓰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디오네 / 2008년 10월
평점 :
정말 오랜만에 상큼발랄, 유쾌통쾌한 책을 읽었다. 앞서 작가의 다른 작품인 '도피행' 이란 책을 읽었는데 다소 심오한 주제에 마음이 건조했던 차였다. 그런데 '이번엔 왠 오타쿠?'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었는데 몇장 넘겨보다보니 너무 재밌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표지를 보고 있으면 왠지 내용이 유치할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니 육아문제, 남녀평등, 결혼문제 등등 나름 생각하게끔 하는 문제들이 숨어있다.
신이치의 직업은 해외 sf 번역가. 하지만 그것은 번듯한 직업이라 할 순 없다. 일이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편이 아니어서 근근이 벌어먹고 있는 셈이다. 거기다 일본 현대 여성들이 바라는 남성상인 '3고' 에 철저히 맞서는 '3저'. 낮은 연봉에 작은 키에 학력도 그리 좋지 않다.
이런 그가 완벽한 그녀를 만났다. 그 이름은 바로 리카코. 그녀는 도쿄대를 좋업해 동방신탁은행에 입사했고 또한 미국에서 MBA를 취득한 바 있다. 거기다 신이치보다 키까지 크다. 정말 안어울리는 한쌍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 완벽한 여자는 신이치와의 인터뷰끝에 몇번의 만남을 가지고 바로 결혼을 승낙해버린다. 이쯤되면 뭔가를 의심하게끔 된다. '도대체 왜지?' 라는 숱한 의문이 듬과 동시에 혹시 리카코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물론 신이치가 어딘가 하자있는 사람이라거나 결혼엔 어울리지 않다라는 건 아니다. 그냥 왠지 그런 완벽한 여자는 눈까지 머리 위에 붙어서 최고의 남자를 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신이치는 빨리 눈치를 챘어야 했다. 처음 그녀의 집에 갔을때 그를 문앞에 세워놓고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인데도 문까지 잠그는 것을 보았을 때 말이다. 물론 그도 이상하게는 생각했지만 그것 역시 철저한 자기관리(?)로만 받아들였던 것이다. 난 이때쯤 같은 여자여서 그런지 하나의 생각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순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해 어찌나 웃었는지 모른다. 과연 리카코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렇게 리카코의 좋은 면만을 보던 신이치는 결혼을 하자 180도로 변하게 된다. 성격도 얼굴도 몸매도 완벽한 그녀의 실체를 알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한번 물어보자. 세상에 완벽한 여자, 혹은 남자가 있을까? 리카코도 인간인데 완벽할 수만은 없지. 내 예상은 확실히 들어맞았다. 그녀의 실체는 히스테릭한 성격에, 절대 손하나 까딱하지 않아 집을 온통 먼지구석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신이치는 그런 그녀 모습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여자가 어떻게 저럴수가 있을까' 하며 끝내는 그녀를 인간으로 둔갑한 에일리언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정말 한 장면 한 장면이 어찌나 재밌는지 읽는 내내 웃었다. 특히 에일리언이라는 말에. 사랑하는 여자가 한순간 에일리언으로 돌변해버린다니 리카코가 좀 심한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신이치가 한없이 불쌍해지기도 하고.
그는 결국 이혼을 결심한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기에 확고한 결심을 보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리카코의 입에서 청천벽락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임.신. 이젠 헤어질 수도 없다. 아이를 너무도 싫어하는 신이치이기에 자신에게 아이가 생긴다는 상상은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생활은 꼬일대로 꼬여 아내를 향한 의심스런 마음까지 품게 된다. 물론 그것은 사랑스런 아이가 태어나면서 해프닝으로 일단락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신이치의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싫어했건만 자신의 클론과도 같은 아이를 보자마자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역시 자식이란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아이가 태어나 리카코는 출산휴가를 받지만 신이치의 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언제쯤 두 다리 쭉 펴고 지낼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리카코의 모습 또한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현실성있는 여자들의 모습이랄까.
내가 여자여서 그런건지 리카코가 좀 심하다 싶은 면도 있긴 하지만 신이치가 조금만 그녀를 이해해줬으면 하고 생각했다. 나도 처음엔 같은 여자이지만 너무한다 싶었지만 그녀에 대한 불평을 쏟는 그에게 아키야마가 한 따끔한 충고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타쿠에게 뿐만이 아니라 세상 그 어느누구에게도 완벽한 여자란 없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사람인 경우 오히려 빈틈이 더 많을 수 있다. 남들에게 강하고 완벽하게 보이려 할수록 그 빈틈은 겹겹의 가면으로 쌓아가기 때문이다. 100프로 신이치에게 모든 역할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의 그런 빈틈을 좀 불평없이 감싸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반응은 이러한데 과연 이 책을 읽은 남자들의 반응은 어떨지 궁금하다. 왠지 당장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 같기도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