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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 - 뱃님 오시는 날
요시무라 아키라 지음, 송영경 옮김 / 북로드 / 2025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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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문학과 역사문학의 대가라 손꼽힌다는 ‘요시무라 아키라‘ 국내에는 이번에 <파선>으로 처음 소개되는 작가입니다. 작년 연말 출간 예정작으로 소개된 것을 보고, 제가 손꼽아 기다렸던 책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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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에도시대의 어촌 마을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장례를 치르는 모습, 물고기를 잡는 모습, 이 마을의 일 년은 어떤 모습으로 지나가는지, 이웃 마을의 이야기라며 ’마비키‘라고 불리던 영아 살해 풍습까지 등장을 하는데요. 이런 생활상을 자세히 묘사해 주어서 제가 그 마을 주민이 된 것처럼 금방 몰입해서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 ’이처럼 죽음이라는 운명이 정해진 자에게 음식을 나눠 주는 가족은 없다.‘ _ p.7
이 마을은 경작지가 있기는 하나, 자갈이 많고 비옥하지 못해서 경작이 잘되지 않고, 산세가 매우 험한 곳에 고립이 되어 있어 물건을 사고팔기도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가족 중 병자가 생기면 입이 하나 주는 일이기에 음식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하며, 마을 사람들이 고용 하인으로 몇 년씩 나가서 일을 하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이 굶주리지 않고 아이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기다리는 것은 딱 하나.
바로 ’뱃님‘입니다.
- ’사나워진 바다는 때로 마을에 생각지 못한 은혜를 베푼다. 은혜는 매우 드물게 찾아오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희망을 품고 산다.‘ _ p.17
이 뱃님은 바다가 거칠어지는 시기에 난파된 배를 이야기하는데요. 난파된 배가 마을에 오면 이 안에 있는 곡식과 물건으로 풍족하게 몇 년을 지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들은 매년 해안가에서 소금을 구우며 ’뱃님‘을 기원하는데, 이는 기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난파되도록 유도하는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 “정 같은 것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그들을 한 명이라도 살려두었다가는 마을에 재앙이 닥칠 것이야. 우리 선조들은 이들을 때려죽이기로 결정하셨고, 마을은 지금까지도 선조들의 결정을 따르고 있어. 마을의 관례는 반드시 지켜야 해.” _ p.125
책을 읽다 보면 마을 사람들의 힘든 생활을 보며 그들을 동정하게 되는데요. 그러다가도 배가 난파되고 기뻐하는 모습들, 그 안의 사람들을 해치고 물건을 챙기는 모습이 상상되면서 문득문득 기묘한 공포감이 올라오더라고요.
- ’뱃님맞이는 이 마을에는 최고의 경사인 반면 이웃 마을을 비롯한 다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극형을 받아 마땅한 악행인 것 같다.‘ _ p.150
이런 이들에게 드디어 뱃님이 찾아오는데요. 배 안에는 빨간 기모노, 빨간 버선, 빨간 허리띠를 한 시체들이 가득하고, 이후 마을에는 파국이 들이닥칩니다.
결말을 보고 권선징악! 꼴좋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왠지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들이 유지했던 악습이 제게는 아이들을 굶겨 죽이지 않고, 가족을 멀리 하인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던 걸로 보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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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너무 흥미롭고 일본 에도시대 버전의 기묘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재밌게 봤습니다 :) 하루 만에 정말 후루룩 읽어버렸네요.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더 출간됐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요 :) 나오면 꼭 챙겨 볼 것 같은..
몰입감이 상당한 소설!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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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은 조금씩 아껴 먹거라. 뱃님이 언제 또 오실지 알 수 없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안 오실 수도 있다. 그러니 쌀에 맛을 들이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 ( p.128 )
-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무서운 일은 마음이 해이해지는 것이야.” ( p.156 )
- 병에 걸렸다기보다는 저주가 내린 것 같았다. ( p.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