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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2월
평점 :
< 한 말씀만 하소서 >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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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님은 제 최애 국내 작가이기도 하시고, 제게 오래된 단어들이 주는 맛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작가이기도 하십니다. 작가님 책을 보면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이 곳곳에 보이는데, 저는 그 단어 뜻을 찾아보면서 천천히 책을 읽어나가는 시간이 참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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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입니다. 훗날 활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거나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닌 극한 상황에서 통곡 대신 쓴 것입니다. ( p. 9 )
수시로 짐승처럼 치받치는 통곡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통곡을 고스란히 참기가 너무 힘들어 통곡 대신 미친 듯이 끄적거린 게 이 글입니다. ( p. 11 )
*참척 : 참혹할 慘 슬플 慽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참척이라고 부르죠. 자식을 잃은 부모는 그 슬픔의 크기가 너무나도 커서 그 부모를 부르는 호칭조차 만들지 못했다는 말이 있는데요.
<한 말씀만 하소서>는 88년에 작가님이 하나뿐이던 아들을 먼저 보내시고 통곡으로 써 내려간 일기입니다.
이 책은 저도 계속 함께 애타고, 그립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어요.
저도 아들을 키우는 어미로써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그 마음 어떨지 감히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한 번에 쭉 읽기는 절대 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그만큼 책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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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손가락에 가시 같은 게 박혀본 적은 아마 있을 것이다. 가시 박힌 손가락은 건드리지 않는 게 수잖니? 이물질이 닿기만 하면 통증이 더해지니까. ( p. 85 )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걱정되었던 딸은 부산으로 어머니를 모시게 됩니다.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옆에서 도움을 주려는 딸의 마음은 고통으로만 다가왔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이해인 수녀님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분도 수녀원’의 수녀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수녀원에 머물게 됩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수녀님들과 이야기하고, 신을 끝없이 원망하고 질문을 하고, 또 뜻하지 않은 답을 얻게 됩니다.
책은 슬픔에서만 끝나지 않아요. 슬픔 끝에서 답을 찾고, 그 답에서 다시 글을 쓸 힘과 이유를 찾게 되면서 깨달음과 희망으로 끝납니다.
“주여,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 p. 211 )
마지막 따님이 쓰신 글의 마지막 문장인데요. 이 문장을 읽고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ㅠ
본인의 부끄러움과 결점이 될 수 있는 부분도 솔직하게 고백하며 위선을 벗어던지기 위해 노력하셨던 작가님에게 또다시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책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 - P18
곤궁했을 때 받은 얼마 안 되는 금전적인 도움이나 우울한 날 말동무해 준 친구의 우정도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는 게 사람의 도리이거늘 어떻게 25년 5개월 동안이나 나를 그렇게 기쁘게 해준 아들을 잊는 게 수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 P19
그저 만만한 건 신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 P47
그 애에게서 생명이 없어지다니. 들꽃으로라도 풀로라도 다시 한번 피어나렴. - P78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 - P127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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