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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피앤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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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우리가 신을 인식하고, 인간으로서 인간의 정신과 감정과 본성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신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인간의 감정과 욕망과 본성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지한 자는 외부의 원인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란되어 결코 정신의 참다운 만족을 향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치 자신과 신과 사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활하고, 작용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멈춘다.

 

 이에 반하여, 현자는 현자로서 고찰되는 한에 있어서 정신이 거의 동요되지 않고, 자기와 신과 사물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하여 의식하며, 결코 존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언제나 정신의 참다운 만족을 향유하고 있다.”(에티카, 제5부 정리 42의 주석에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들, 살면서 만족을 위해 맹렬히 노력하는 모습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인간이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누구나 나름대로 어느 정도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한에 있어서 나름대로 노력하여 얻은 기쁨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사라지거나, 슬픔 또는 고통으로 변하는 것이 상당히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다.

 

또, 자연 속에서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의 법칙과 질서, 사물의 이치, 인간의 정신과 감정과 본성 등에 대한 무지와 착각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무지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절대적인, 자연의 필연적 이치와 상황이 요구하는 것에 의해 압도되어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물질 및 정신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진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갖가지 예속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헛되거나 거짓된 기쁨이 아닌 참되고 지속적인 기쁨을 향유하기를 바란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진정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 정신의 본성상 이미 결정된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부당한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는 것을 알면서 기뻐할 수 없고, 우리가 무지와 착각 속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우리가 그것들에서 벗어나 참된 인식을 얻거나 기쁨이 슬픔으로 변하는 순간 헛된 것이었음이 판명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더라도 외적으로는 우주의 본질 및 특성들을, 그리고 내적으로는 인간의 정신과 감정과 본성을, 정확히 인식하여 자연의 법칙과 질서, 사물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그러면서도 자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향유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러한 의지가 실현된다면 그 때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능력만큼의 만족을 얻어 누리고, 동시에 아무것도 한탄할 수 없는 평온한 마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자연의 법칙과 질서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우리가 그런 줄 알면서 어떻게 자신의 노력과 능력 이상의 것을 성취하기를 바랄 수 있으며, 자연의 법칙과 질서를 거스르는 것을 욕구하고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신과 자기와 사물을 거의 의식(인식)하지 못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로서만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맹렬하게 전심전력으로 헛되거나 허망하거나 무가치한 목적에 집착하고 열광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연의 법칙과 질서, 즉 신의 섭리와 명령을 거스르고 어기며 뜻을 이루어 참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자연의 법칙이나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자세는 자연의 이치에 대한 도전, 신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과신하는 허술한 자가 자기를 포함한 전체 자연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강력한 자연 자체나 신을 어떻게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자는 헛수고에 헛되게 집착하는, 허구와 허위에 매몰된 자일뿐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무지한 자, 수동적인 정신을 가진 자, 작용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멈추는 자, 수동적인 감정에 예속되어 휘둘리는 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명한 자, 능동적인 정신을 가진 자, 작용받는 것보다는 작용하는 것이 더 많은 자, 지성을 발휘하여 수동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자, 정신의 참다운 만족과 자유를 향유하는 자는 어떻게 하여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우리의 스승 스피노자는 여기 ≪지성교정론≫과 ≪에티카≫에서의 논리적인 증명과 설명으로써 우리가 신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정신과 감정과 본성과 예속과 자유에 대해서 보다 정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를 참된 인식과 자유와 만족의 길로 이끌고 있다.


                                             옮긴이 黃 泰淵

 

 

 


           <에티카> 정오표                                         


   42p,  3(6)행. 만자기 -> 만자가                              

   63p,  6행. 정의 -> 정리                                  

   104p, 12행. 활동한다. ->활동한다는 것을,                  

     15행. 나온다. ->나온다는 것을 밝혔다.                      .

   140p, 22행.  첫 번째 -> 세 번째                          

   174p, 8행.  감정에 ->                                     

          감정에(그것의 진짜 원인으로부터)                              

   266p, 16행. 원리를 -> 권리를                             

   294p, 20행. 누구에게고 -> 누구에게도                        

   335p, 28행. 사랑 -> 사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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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피앤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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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와의 대화 1


상수리;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이렇게 기꺼이 대화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피노자;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상수리(황태연)님이 ‘신학정치론’에 이어 ‘지성교정론’과 ‘에티카’를 새롭게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일에 대해 애쓰셨다는 말과 함께 축하를 드립니다. 이번 ‘에티카’ 번역출간을 보고 나는 상수리님이 나의 사상 및 철학에 매우 관심이 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이유로 나의 사상 및 철학에 대해 깊은 관심과 연구의지를 갖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상수리; 제가 선생님의 사상에 남다르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젠가부터 스스로 이 세상 자체가 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선인들의 이런저런 사상을 접하는 동안 선생님의 ‘신은 곧 자연이다’라는 사상이 저에게 강한 흥미를 유발시켰고, 그에 이어서 선생님의 사상에 대한 탐구의욕이 자연스럽게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열여덟 살 시절에 선생님의 주저인 ‘에티카’ 번역본을 문고판으로 구해서 처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에티카를 처음으로 읽을 때  처음 한 페이지를 읽고는 너무나도 생소한 표현과 난해함 때문에 그만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린 일이 생각납니다. 물론 그것으로 ‘에티카’를 읽기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책을 붙잡고 읽으며 이해해보려고 끈질기게 노력했습니다.


에티카를 항상 머리맡에 놓아두고 수시로 책을 펼쳐 읽고 또 읽으며, 마치 깊이 감추어진 보석을 찾아내려는 듯이 무척이나 열심히 반복하여 에티카를 읽었습니다. 그 번역본은 강두식님과  김평옥님의 번역본인데 번역이 어떠한지에 대해 따져볼 마음도 능력도 그때는 없었기에 그저 열심히 읽고 생각하고 또 읽는 것만 반복했습니다. 열심히 책을 읽다보니 책이 중간이 갈라지고 파손되는 지경에 이르러 다시 같은 책을 사서 계속 읽어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강영계님의 번역본이 나와 있길래 그 책을 또 사서 열심히 읽으며 미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마저 다 이해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는 중에 에티카 원문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에드윈 컬리의 영역본 전집을 구입했고 다른 영역본과 사무엘 셜리의 ‘신학정치론’ 영역본, 그리고 사무엘 셜리의 스피노자 전집도 구입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 중에 나이를 먹게 되고 사물의 이치와 인간, 인간 사회에 대해 나름대로 인식한 것이 쌓여 새롭고 더 정확한 인식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에티카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기존의 번역본들이 가진 미비한 점, 애매한 표현(이것은 어떻게든 에티카를 더 정확히 이해해보려는 나의 노력을 저지하고 방해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상한 표현 등을 모두 극복, 해결하여 에티카에 대한  더욱더 정확하고 완전한 독해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과 행동이 선생님의 사상과 철학을 더 정확히 이해하려는 저의 마음과 연구의지가 실현된 것이라고 봐주시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 좋습니다.  나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통하고 일치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니 동지를 만나는 것이라서 일단은 반갑고, 그토록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나의 철학을 이해하려 지속적으로 노력했다하니 앞으로도 계속 좋은 결과가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상수리;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역시 선생님을 동지요 스승이요 선배라고 여기며 선생님의 철학을 철저히 이해하고, 혹시라도 미비한 점이나 오류가 있으면 수정 보완하여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추구할 만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더욱 완전한 인식을 위해 힘써 노력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스피노자;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의 철학에 경의를 표하고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도 나의 철학 전체를 시원스럽게 해석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내가 올바르고 충분할 수도 있고 잘못되고 불충분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표현의 문제인지 독자 및 연구자들의 독해력의 문제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나의 철학 중에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그 점이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 점에 관련해서 앞으로 상수리님이 긍정적인 역할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상수리; 그러한 일에 저의 능력이 유효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성의껏 노력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오늘 이렇게 대화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뵙고 대화하기를 청할 때 반갑게 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피노자; 이성적인 사람으로서 서로 통하고 일치한다면 가장 좋은 조건에서 서로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도 얼마든지 의미 있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음에 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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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치론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신아출판사(SINA)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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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의 문장들은 왜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는가?


본인이 번역한 ‘신학정치론’은 게프하르트의 독일어 번역본을 영어로 옮긴 사무엘 셜리의 영역본 ‘신학정치론’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셜리의 영역본이 영미에서는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그보다 먼저 독일의 게프하르트라는 사람이 학자들이나 독자들에게  스피노자의 저술 번역과 해석 부문에서 크게 인정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스피노자의 저술들은 주로 라틴어로 쓰여 있어서 오늘날의 우리가 보았을 때는 해석하기 쉽지 않다. 나도 라틴어 원문을 보았지만, 라틴어는 오늘날의 영어 등과  비교했을 때 문장성분이 생략된 것이 많다. 사전을 보아도, 단어의 뜻이 대개는 (영어로)풀이가 되어 있으나 종종 뜻을 분명히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의 문장을 해석할 때는 문맥을 고려하고,  라틴어와 맥을 같이하는 오늘날의 영어 등과 스펠링이 비슷한 단어를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래도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쨌든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해석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라틴어 원문에서부터 스피노자의 문장은 간단하지가 않다. 문장이 길기도 하고 의미도 난해한 경우가 많아서  독해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결국 그 문장을 영어로 옮긴 셜리의 번역문도 간단한 문장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내가  번역한 한국어 ‘신학정치론’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은 글이 되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본 사람들은 스피노자의 사상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수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에티카에서의 스피노자의 사고방식이나 사고수준이 신학정치론에서도 역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맞는 판단이 될 것이다. 나도 신학정치론을 번역하면서 문장이 왜 이리 어렵고 복잡한가 하며 불만스럽게  생각했으나  진리를 표현하는 스피노자의 방식을 우리가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일은 그의 사고와 사고방식이 남다르고 뛰어났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임을 인정하고, 문장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어로 된  또 다른 번역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좀 있다.

그 책의 원문은 이것(a translation from Bruder's 1843  Latin  text  by  R.H.M.  Elwes  (1883).)데, 나도 이 원문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문장 자체가 스피노자의 것과 닮은 것이 아니다.  확실히 말하건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문장이(전부일 수도 있다) 개조 내지 변조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글의 내용을 모조리 개조, 변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그런 의도가 있었다고도 보지 않는다). 아마도, 앞에서 설명한 대로, 문장이 길고 난해한 형식으로 되어 있으므로  독자들이 좀더 쉽게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그렇게 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역자는 긴 문장을 해체하여 짧은 문장으로 재조합(개조)했으며, 그에 따라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불일치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불일치가 과연 무시해도 될 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연구해보지 않았고 별로 연구할 마음도 없다. 

Elwes의 신학정치론 원문은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의 아마존 닷컴에 가보면 책으로는 나와 있지 않다.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에서도 신학정치론이 언급되고 있고, 그가 Elwes책을 읽은 것이 나타나 있지만  그때는 미국에도 그것밖에 없어서 그것을 읽었다고 본다. 오늘날 영미인들은 왜 Elwes의 책 대신에 사무엘 셜리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인가?  좀더 정확한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다.

인류역사에 남은 훌륭한(완벽하다는 사람도 있다) 논문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여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지만,  쉽게 독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문장을 개조, 변조하면  과연 저자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나는 확실히 의문이 생긴다.

나의 입장으로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어떤 훌륭한 표현이나 사고방식을 본받을 수 있는 기회도 가치 있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사고력을 점검하고 단련하는 기회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라틴어 원문과 일치하거나 최대한 닮은 문장형식을 유지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점이 내가 신학정치론을 번역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번역문은 될 수 있는 한 원문과 일치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해하기 쉽도록 재량껏 개조 또는 변조를 해도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판단을 하든지 그것은 각자의 자유의 영역이다.

나에게는 나의 소신이 있을 뿐이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을 번역하면서  나는 참다운 인식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신학정치론]

원문

Spinoza, Benedictus de, 1632-1677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English]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Gebhart edition, 1925) / Baruch Spinoza; translated by Samuel Shirley 


참조문헌 

A THEOLOGICO-POLITICAL TREATISE ; A translation from  Bruder's 1843  Latin  text  by  R.H.M.  Elwes  (1883).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 라틴어 판본

; http://www.spinozaetnous.org/wiki


황 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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