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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비홍 / 2014년 1월
평점 :
강영계선생의 에티카 번역에 대하여
글쓴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지성교정론 및 에티카, 정치론의 번역자 황태연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 번역본을 아직 안읽어 본 사람과 읽었더라도 책속의 문장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를 읽는다는 것은 그에게 oo당한다는 의미이다.
에티카는 몹시 난해한 책이어서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책이다. 이 점이 여러 가지 특이한 현상들을 발생시킨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에티카를 읽어도 충분히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철학교수들과 철학박사들이 나서서 일반인을 상대로 해서 에티카에 대해 좀 아는 체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박사들이나 교수들이 나서서 번역을 했다고 내세우면 그래도 박사이고 교수인데 잘 했겠지 하고 대충 인정해주는 분위기나 선입견이 있고, 이것을 그들이 이용하려고 마음먹으면 아주 쉽게 이용할 수가 있다.
번역을 하면서 더 많이 아는 체하는 방법은, 별 것이 아니어도 독자들에게 낯선 용어나 표현이 나오면 그것을 기회로 삼아 좀 장황하게 주석을 달며 설명을 첨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아는 체하는 것인가 하면, 다른 문장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번역하지도 못하면서 별로 어렵지도 않거나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싱겁게 풀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건대,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2006년 3월 30일 발행한 책임)는 라틴어번역본이 아니다. 그가 라틴어로 쓰인 책을 펼쳐놓고 보기는 했을지 몰라도 번역을 할 때 주로 본 것은 영어로 쓰인 번역본과 이전에 번역되어 있던 한국어 번역본(강두식, 김평옥의 에티카 번역본)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어 번역본을 지나치게 참조했다.
이점에 대해서는 두 책을 대조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단적인 증거를 제시하겠다.
에티카 제1부 끝부분에 부록이 있는데, 강두식, 김평옥 두 분이 그 부분을 번역하면서 실수로 한 문장을 빠뜨렸다. 그런데 강영계 선생도 오묘하게 그 부분에서 같은 실수를 하며 그 문장을 누락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번역; (제1부 부록의 앞부분에서); ... 신의 절대적 본성이나 신의 무한한 힘에 의한다는 것 등의 성질을 설명하였다. [여기서 한 문장이 누락되었음]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편견이 남이 있어서,,,,,,
강두식, 김평옥 두 분의 에티카번역; (제1부 부록의 앞부분에서)... 神의 절대적 本性 또는 神의 무한한 能力에 의한다는 것······ 그러한 여러 가지의 특질을 설명했다. [여기서 한 문장이 누락되었음] 그러나 아직도 적지 않은 편견이 남아 있어, ········
누락된 문장; 더욱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나의 증명들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편견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부분에 대한 황태연의 번역;·····모든 것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데, 의지의 자유나 절대적 재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절대적 본성 또는 무한한 능력에 의해서 그러하다는 것 등을 설명하였다. 더욱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나의 증명들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편견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물들의 연결을 내가 그것을 설명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장애물이었고, 지금도 장애물인 상당수의 편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여기서 ·····.
강두식, 김평옥 두 분이 실수로 한 문장을 빠뜨린 바로 그 부분에서 오묘하게 강영계 선생도 역시 그 문장을 빼먹은 이유는 어떤 것이겠는지, 상상력과 판단력이 엉터리가 아닌 사람은 누구라도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번역들
1. 제2부 정리 8의 주석에서 직사각형 (rectangle.)을 직각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명백히 오역이다.
그 부분에서의 강영계 선생의 번역; 예를 들면 원은 그 안에서 서로 교차되는 모든 직선의 선분으로 형성되는 직각이 서로 동일하다고 하는 본성을 가진다.·······
모든 직각들은 서로 비교하고 말 것도 없이 다 동일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원 안에서 형성된 두 닮은 꼴 삼각형들의 성질에 관해서이다.
이 부분에 대한 황 태연의 번역; 원은 그 안에서 교차하는 모든 직선의 선분들로 이루어지는 직사각형들이 서로 같다는 본성이 있다. 그러므로 원 안에는 서로 같은 무한히 많은 직사각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
2. 제4부 정리 5를 보면, 각각의 열정의 힘과 그 증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서 열정은 라틴어passionis를 영어 passsion과 같게 보고 열정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수동적 감정의 뜻을 갖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열정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정신이 작용을 받는 것을 의미하도록 사용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황태연의 번역; 정리 5. 각각의 수동적 감정의 힘과 성장, 그리고 그것의 존재의 지속은 우리가 존재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능력에 의해서 한정되지 않고 우리의 능력과 비교되는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하여 한정된다.
3. 제1부 정리29를 보면, “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라고 나와 있는데 맨 앞에 있는 ‘사물의 본성에는’은 ‘도대체 자연스럽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에는’으로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같은 표현인 라틴어 In rerum natura를 강영계 선생은 ‘사물의 자연안에는’(제1부 정리5에서)이라고 번역했다가, 또 어떤 때에는 ‘사물의 본성에는’(제1부 정리 29에서)이라고, 또는 ‘자연의 사물 안에’(제4부 부록 제8항에서)라고 번역했다.
In rerum natura은 영어로는 In nature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어렵게 생각한 것 같다
황태연의 번역과 기존 번역과의 차이점
차이점이 많지만 두 가지만 언급해 보겠다.
1. 기존 번역에서 ‘명석 판명한 관념’이라고 번역한 것을 황태연 번역에서는 ‘뚜렷하고 명확한 관념’이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영어로는 clear and distinct idea이고 라틴어로는 claram, et distinctam ideam 인데 한국의 철학자들은 현학적이고 일반인들이 잘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의미도 애매한 ‘명석 판명한’이라는 표현을 애용한다.
‘명석 판명한’을 최초에 쓴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참 현학적이고 이상한 표현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개념도 아니고 용어도 아니고 그냥 형용사일 뿐이고, 강조하느라고 비슷한 단어를 두 번 반복한 것에 불과한 것이 무슨 중요한 개념이나 용어인 것처럼 다루어졌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흔히 나오는 말이 데카르트가 인식의 문제에서 중요시하고 즐겨 사용한 표현이라고 하는데, 데카르트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그것은 용어도 개념도 아니고 형용사일 뿐이다.
2. 기존 번역에서 ‘자극하다’와 ‘자극되다’로 번역한 것을 황태연 번역에서는 ‘자극하여 변화시키다’와 자극받아 변화되다‘로 (새로 표현을 만들어서) 번역했다. 이것은 영어로는 affect로 표현되고, 라틴어로는 affectus 로 표현되는 것이다. 나는 그 affect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해서 제2부 정리 13의 뒤에 나오는 요청 5에서 설명된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 이 affect는 나중에 여러 감정들이 생기는 과정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감정은 인간의 신체(특히 뇌)가 자극받아 변화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데, 어떤 때에는 자극받아 더 좋게 변화되고, 또 어떤 때에는 자극받아 더 나쁘게 변화되어 기쁨 또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 감정이 되는 것이다. 자극만 받는 것과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또 능동형으로 쓰일 때에는 ‘자극하여 변화시키다’가 되는데, 이것은 어떤 감정을 발생시키는 것을 말하는 표현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한국의 철학교수들이나 철학박사들은 스피노자의 철학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주장이나 해석을 참고하기는 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여 스피노자의 사상을 연구하지 않는다. 나는 또 이 지구상의 스피노자를 연구하는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학자도 추종하지 않는다.
한국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외국의 스피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적당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도 스피노자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추종이 대상이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와 같은 책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배우려면 잘 이해한 사람에게 배우든지 말든지 해야지 자기도 이해를 못해서 용어분석이나 하는 사람에게 무슨 수준 높은 것을 배우려 한단 말인가?
나는 스피노자도 추종하지 않는다. 나는 스피노자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자연)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철학자라는 것을 알고 크게 매력을 느껴 열심히 연구하며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는 것뿐이다.
나는 스피노자를 충심으로 존경하고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저술들을 아주 정성들여 번역하기도 했다.
스피노자가 소중히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했던 것들을 나도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공통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서 원하고 추구하는 것들에 있어서도 공통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와 닮은 스피노자를 소중히 생각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존엄과 진정한 만족을 원하고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와 공통적인 것들을 원하고 추구했던 스피노자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에게 훌륭한 것들을 배우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번역본들이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나는 철학박사학위도 없고, 또 철학교수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철학박사들이나 철학교수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별 관심이 없지만, 나의 번역이 그들의 번역보다 좋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에 대해서는 많이 억울한 생각이 든다.
지성과 냉철함을 발휘하여 선입견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나의 번역본들을 올바르게 평가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