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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와 역자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 책을 출간했는가?

    unevie ㅣ 2017-04-25 ㅣ 공감(2) ㅣ 댓글 (0)

    출 판사와 역자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 책을 출간했는지 의심스럽다.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인식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고 간주되는 개념어 선택 뿐만 아니라 교정을 본 것인지 의심스러운 비문과 틀린 맞춤법까지. 역자는 왜 이 책을 번역하는 헛수고를 사서 했는지 (학문적인 유용성은 눈곱만큼도 없다), 수준 이하의 졸역 뿐만 아니라 학교 복사실에서 제본한 것만도 못한 책의 제본 및 디자인 상태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엽서체가 웬 말인가) 이 가격을 책정한 출판사는 양심이란 게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건 뭐 사기 수준 아닌가?


    혹여나 지금 이 리뷰를 읽고 있는 당신이 이 책을 살까 고민하는 중이라면, 그 돈으로 치킨 한 마리 시켜드시길. 여러분의 정신 건강에 그게 훨씬 이롭습니다.



    ...........................................................................................................................




    글쓴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에티카, 지성교정론, 정치론의 역자 황태연



      신학정치론의 역자이며  이 책을 출판한 발행인으로서 위의 글에 대하여 댓글을 씁니다.



    unevie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심히 부정적인 의견을 아무런 근거제시도 없이 거침없이 하는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그대가 말한 비문과 맞춤법이 틀린 문장이나 단어를 적어도 하나쯤은 분명히 인용하여 제시해주기를 바랍니다.( 많이 제시해도 좋습니다 )



    학문적인 유용성이 어느 정도 있는지 없는지를 그대가 완전히 확실하게 입증할 수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런 수준의 졸역과 학교 복사실에서 제본한 것만도 못한 책의 제본 및 디자인 상태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엽서체가 웬 말인가) 이 가격을 책정한 출판사는 양심이란 게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건 뭐 사기 수준 아닌가?”  



    졸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나 증명이 제시되어야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제본과 디자인을 문제 삼다가, 엽서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라고 주장하고, 가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양심이 있는지조차 의심하다가 급기야는 사기수준이라는 생각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적합한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역자와 출판사를 매도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이성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의견을 제시하여 다른 사람들이 부정적 생각을 갖도록 유도하려는 것이 목적이겠지요.



    그렇다면 나도 한 명의 독자로서 의견을 말해봅니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그의 에티카 못지않게 내용도 매우 난해하고, 표현에 있어서는 에티카보다 더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독해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책입니다. 원문인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표현한 신학정치론은 아주 수준이 높고,  많은 경우에서 문장이 길고 복잡하며 내용이 특이하고 난해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성서에 대한 (자연철학적 사상에 근거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비판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 정치와 국가에 관한 탁월하고 정확한 고찰과 사상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점이 철학에 관심과 애착이 깊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매력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경우 다소 무익하고 짜증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신학정치론을 읽으려는 사람들은 그 점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학정치론은 어떤 속물스러운 욕망이나 천박하고 잡스러운 것을 좋게 보거나 추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만족을 원하고 추구하는 스피노자의 집요하고 이성적인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는  대단한 책입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이성적인 사람이 공들여 쓴 책은 이성적인 자세로 대하고 읽어야만 비로소 이해하고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를 유지하고 누리려면 어떤 비이성적인 것에 휘둘리거나 지배당하지 않아야 하고, 어떤 정확하지 않은 것을 함부로 믿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출판한 신학정치론도 있고, 외국어를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영역본도 여러 가지가 출판되어 있으며, 일본어나 중국어로 된 신학정치론도 있으니 그것들 중에 골라서 읽어보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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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evie 2017-04-26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삭제 | URL

서문부터 시작하여 너무 많아서 일일이 지적하기도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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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치론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황태연 / 비홍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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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p0711 ㅣ 2017-04-25 ㅣ 공감(1)댓글 (0)
번역의 질, 가독성, 편집, 가격 그 모든 면에서 최악으로 수렴한다. 그냥 사지 마세요. 컬리의 영문 번역본이 나왔으니, 그거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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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지성교정론, 에티카, 정치론의 역자 황태연.


shp0711님이 간단하게 한 줄로 이 책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리고 싶은 심정을 표현하셨네요.


너무나 간단해서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출판한 신학정치론도 있고, 외국어를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영역본도 여러 가지가 출판되어 있으며, 일본어나 중국어로 된 신학정치론도 있으니 그것들 중에 골라서 읽어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에드윈 컬리의 영역본이 아무리 유명하고 권위가 있어 보인다 해도 철저히 추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항상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보다 이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정치론은  그의 에티카 못지않게 아주 난해한 책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아주 합리적이고 고도로 논리적인 사고력을  발휘해서 쓴 책이기 때문에 , 우리의 이성을 파고들어 설득하는 힘이 대단히 강력합니다.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의미있고 유용한 것들을 가르쳐줄 수 있고,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우리를 힘들게 하고 시험하는 면도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과정에 대한 각오와 끈질김 ,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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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치론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황태연 / 비홍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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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와 역자는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 책을 출간했는가? 새창으로 보기
unevie ㅣ 2017-04-25 ㅣ 공감(2)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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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에티카, 지성교정론, 정치론의 역자 황태연


  신학정치론의 역자이며  이 책을 출판한 발행인으로서 위의 글에 대하여 댓글을 씁니다.


unevie님은 무슨 이유로 이런 심히 부정적인 의견을 아무런 근거제시도 없이 거침없이 하는지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그대가 말한 비문과 맞춤법이 틀린 문장이나 단어를 적어도 하나쯤은 분명히 인용하여 제시해주기를 바랍니다.( 많이 제시해도 좋습니다 )


학문적인 유용성이 어느 정도 있는지 없는지를 그대가 완전히 확실하게 입증할 수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런 수준의 졸역과 학교 복사실에서 제본한 것만도 못한 책의 제본 및 디자인 상태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엽서체가 웬 말인가) 이 가격을 책정한 출판사는 양심이란 게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건 뭐 사기 수준 아닌가?”   


졸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나 증명이 제시되어야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제본과 디자인을 문제 삼다가, 엽서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음)라고 주장하고, 가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양심이 있는지조차 의심하다가 급기야는 사기수준이라는 생각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적합한 근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역자와 출판사를 매도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이성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의견을 제시하여 다른 사람들이 부정적 생각을 갖도록 유도하려는 것이 목적이겠지요.


그렇다면 나도 한 명의 독자로서 의견을 말해봅니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그의 에티카 못지않게 내용도 매우 난해하고, 표현에 있어서는 에티카보다 더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독해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책입니다. 원문인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표현한 신학정치론은 아주 수준이 높고,  많은 경우에서 문장이 길고 복잡하며 내용이 특이하고 난해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성서에 대한 (자연철학적 사상에 근거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비판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 정치와 국가에 관한 탁월하고 정확한 고찰과 사상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이점이 철학에 관심과 애착이 깊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매력으로 여겨지지만,  어떤 경우 다소 무익하고 짜증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신학정치론을 읽으려는 사람들은 그 점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학정치론은 어떤 속물스러운 욕망이나 천박하고 잡스러운 것을 좋게 보거나 추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만족을 원하고 추구하는 스피노자의 집요하고 이성적인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는  대단한 책입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이성적인 사람이 공들여 쓴 책은 이성적인 자세로 대하고 읽어야만 비로소 이해하고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를 유지하고 누리려면 어떤 비이성적인 것에 휘둘리거나 지배당하지 않아야 하고, 어떤 정확하지 않은 것을 함부로 믿어버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출판한 신학정치론도 있고, 외국어를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영역본도 여러 가지가 출판되어 있으며, 일본어나 중국어로 된 신학정치론도 있으니 그것들 중에 골라서 읽어보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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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vie 2017-04-26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부터 시작하여 너무 많아서 일일이 지적하기도 힘듭니다.
 
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 비홍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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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계선생의 에티카 번역에 대하여


글쓴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지성교정론 및 에티카, 정치론의 번역자 황태연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 번역본을 아직 안읽어 본 사람과 읽었더라도 책속의 문장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를 읽는다는 것은 그에게  oo당한다는 의미이다.


에티카는 몹시 난해한 책이어서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책이다.  이 점이 여러 가지 특이한 현상들을 발생시킨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에티카를  읽어도 충분히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철학교수들과 철학박사들이 나서서  일반인을 상대로 해서 에티카에 대해 좀 아는 체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박사들이나 교수들이 나서서 번역을 했다고 내세우면 그래도 박사이고 교수인데 잘 했겠지 하고  대충 인정해주는 분위기나 선입견이 있고, 이것을 그들이 이용하려고 마음먹으면 아주 쉽게 이용할 수가 있다.


번역을 하면서  더 많이 아는 체하는 방법은, 별 것이 아니어도 독자들에게 낯선 용어나 표현이 나오면 그것을 기회로 삼아 좀 장황하게 주석을 달며 설명을 첨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아는 체하는 것인가 하면,  다른 문장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번역하지도 못하면서 별로 어렵지도 않거나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싱겁게 풀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건대,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2006년 3월 30일 발행한 책임)는 라틴어번역본이 아니다. 그가 라틴어로 쓰인 책을 펼쳐놓고 보기는 했을지 몰라도 번역을 할 때 주로 본 것은  영어로 쓰인 번역본과 이전에 번역되어 있던 한국어 번역본(강두식, 김평옥의 에티카 번역본)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어 번역본을 지나치게 참조했다.


이점에 대해서는 두 책을 대조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단적인 증거를 제시하겠다.


에티카 제1부 끝부분에 부록이 있는데, 강두식, 김평옥 두 분이 그 부분을 번역하면서 실수로 한 문장을 빠뜨렸다. 그런데 강영계 선생도 오묘하게 그 부분에서 같은 실수를 하며 그 문장을 누락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번역; (제1부 부록의 앞부분에서);  ... 신의 절대적 본성이나 신의 무한한 힘에 의한다는 것 등의 성질을 설명하였다. [여기서 한 문장이 누락되었음]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편견이 남이 있어서,,,,,,


강두식, 김평옥 두 분의 에티카번역; (제1부 부록의 앞부분에서)... 神의 절대적 本性 또는 神의 무한한 能力에 의한다는 것······ 그러한 여러 가지의 특질을 설명했다.  [여기서 한 문장이 누락되었음] 그러나 아직도 적지 않은 편견이 남아 있어, ········


누락된 문장; 더욱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나의 증명들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편견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부분에 대한  황태연의 번역;·····모든 것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데, 의지의 자유나 절대적 재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절대적 본성 또는 무한한 능력에 의해서 그러하다는 것 등을 설명하였다. 더욱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나의 증명들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편견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물들의 연결을 내가 그것을 설명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장애물이었고, 지금도 장애물인 상당수의 편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여기서 ·····.


강두식, 김평옥 두 분이 실수로 한 문장을 빠뜨린 바로 그 부분에서 오묘하게 강영계 선생도 역시 그 문장을 빼먹은 이유는 어떤 것이겠는지, 상상력과  판단력이 엉터리가 아닌 사람은 누구라도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번역

1. 제2부 정리 8의 주석에서 직사각형 (rectangle.)을 직각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명백히 오역이다.


그 부분에서의 강영계 선생의 번역; 예를 들면 원은 그 안에서 서로 교차되는 모든 직선의 선분으로 형성되는 직각이 서로 동일하다고 하는 본성을 가진다.·······


모든 직각들은 서로 비교하고 말 것도  없이 다 동일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원 안에서  형성된 두 닮은 꼴 삼각형들의 성질에 관해서이다.


이 부분에 대한 황 태연의 번역;  원은 그 안에서 교차하는 모든 직선의 선분들로 이루어지는 직사각형들이 서로 같다는 본성이 있다. 그러므로 원 안에는 서로 같은 무한히 많은 직사각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


2. 제4부 정리 5를 보면,   각각의 열정의 힘과 그 증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서 열정은 라틴어passionis 영어 passsion과 같게 보고  열정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수동적 감정의 뜻을 갖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열정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정신이 작용을 받는 것을 의미하도록 사용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황태연의 번역; 리 5. 각각의 수동적 감정의 힘과 성장, 그리고 그것의 존재의 지속은 우리가 존재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능력에 의해서 한정되지 않고 우리의 능력과 비교되는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하여 한정된다.


3. 제1부 정리29를 보면, “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라고 나와 있는데 맨 앞에 있는 ‘사물의 본성에는’은 ‘도대체 자연스럽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에는’으로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같은 표현인 라틴어 In rerum natura를 강영계 선생은  ‘사물의 자연안에는’(제1부 정리5에서)이라고 번역했다가, 또 어떤 때에는 ‘사물의 본성에는’(제1부 정리 29에서)이라고, 또는 ‘자연의 사물 안에’(제4부 부록 제8항에서)라고 번역했다.  

In rerum natura은 영어로는 In nature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어렵게 생각한 것 같다


황태연의 번역과 기존 번역과의 차이점


차이점이 많지만 두 가지만  언급해 보겠다.


1. 기존 번역에서 ‘명석 판명한 관념’이라고 번역한 것을 황태연 번역에서는 ‘뚜렷하고 명확한 관념’이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영어로는 clear and distinct idea이고 라틴어로는 claram, et distinctam  ideam 인데 한국의 철학자들은 현학적이고 일반인들이 잘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의미도 애매한 ‘명석 판명한’이라는 표현을 애용한다.


‘명석 판명한’을 최초에 쓴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참 현학적이고 이상한 표현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개념도 아니고 용어도 아니고 그냥 형용사일 뿐이고, 강조하느라고 비슷한 단어를 두 번 반복한 것에 불과한 것이 무슨 중요한 개념이나 용어인 것처럼 다루어졌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흔히 나오는 말이 데카르트가 인식의 문제에서 중요시하고 즐겨 사용한 표현이라고 하는데, 데카르트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그것은 용어도 개념도 아니고 형용사일 뿐이다.


2. 기존 번역에서 ‘자극하다’와  ‘자극되다’로 번역한 것을 황태연 번역에서는 ‘자극하여 변화시키다’와 자극받아 변화되다‘로 (새로 표현을 만들어서) 번역했다. 이것은 영어로는 affect로 표현되고, 라틴어로는 affectus 로 표현되는 것이다. 나는 그 affect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해서 제2부 정리 13의 뒤에 나오는 요청 5에서 설명된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  이 affect는 나중에 여러 감정들이 생기는 과정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감정은 인간의 신체(특히 뇌)가 자극받아 변화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데, 어떤 때에는 자극받아 더 좋게 변화되고, 또 어떤 때에는 자극받아 더 나쁘게 변화되어 기쁨 또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 감정이 되는 것이다.  자극만 받는 것과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또 능동형으로 쓰일 때에는 ‘자극하여 변화시키다’가 되는데, 이것은 어떤 감정을 발생시키는 것을 말하는 표현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한국의 철학교수들이나 철학박사들은 스피노자의 철학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주장이나 해석을 참고하기는 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여 스피노자의 사상을 연구하지 않는다. 나는 또 이 지구상의 스피노자를 연구하는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학자도 추종하지 않는다.


한국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외국의 스피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적당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도 스피노자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추종이 대상이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와 같은 책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배우려면 잘 이해한 사람에게 배우든지 말든지 해야지 자기도 이해를 못해서 용어분석이나 하는 사람에게 무슨 수준 높은 것을 배우려 한단 말인가?


나는 스피노자도 추종하지 않는다. 나는 스피노자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자연)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철학자라는 것을 알고 크게 매력을 느껴 열심히 연구하며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는 것뿐이다.


나는 스피노자를 충심으로 존경하고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저술들을 아주 정성들여 번역하기도 했다.


 스피노자가 소중히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했던 것들을 나도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공통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서 원하고 추구하는 것들에 있어서도 공통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와 닮은 스피노자를 소중히 생각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존엄과 진정한 만족을 원하고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와 공통적인 것들을  원하고 추구했던 스피노자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에게 훌륭한 것들을 배우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번역본들이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나는 철학박사학위도 없고, 또 철학교수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철학박사들이나 철학교수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별 관심이 없지만, 나의 번역이 그들의 번역보다 좋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에 대해서는 많이  억울한 생각이 든다.


 지성과 냉철함을 발휘하여 선입견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나의 번역본들을 올바르게 평가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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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8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를 공부하는 학우들을 위해 좋은 책을 번역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에티카 - 개정판 스피노자 선집 5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 서광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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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계선생의 에티카 번역에 대하여


글쓴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지성교정론 및 에티카, 정치론의 번역자 황태연



이 책을 아직 안읽어 본 사람과 읽었더라도 책속의 문장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를 읽는다는 것은 그에게  oo당한다는 의미이다.


에티카는 몹시 난해한 책이어서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책이다.  이 점이 여러 가지 특이한 현상들을 발생시킨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에티카를  읽어도 충분히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철학교수들과 철학박사들이 나서서  일반인을 상대로 해서 에티카에 대해 좀 아는 체 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박사들이나 교수들이 나서서 번역을 했다고 내세우면 그래도 박사이고 교수인데 잘 했겠지 하고  대충 인정해주는 분위기나 선입견이 있고, 이것을 그들이 이용하려고 마음먹으면 아주 쉽게 이용할 수가 있다.


번역을 하면서  더 많이 아는 체하는 방법은, 별 것이 아니어도 독자들에게 낯선 용어나 표현이 나오면 그것을 기회로 삼아 좀 장황하게 주석을 달며 설명을 첨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아는 체하는 것인가  하면,  다른 문장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번역하지도 못하면서 별로 어렵지도 않거나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싱겁게 풀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건대,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2006년 3월 30일 발행한 책임)는 라틴어번역본이 아니다. 그가 라틴어로 쓰인 책을 펼쳐놓고 보기는 했을지 몰라도 번역을 할 때 주로 본 것은  영어로 쓰인 번역본과 이전에 번역되어 있던 한국어 번역본(강두식, 김평옥의 에티카 번역본)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어 번역본을 지나치게 참조했다.


이점에 대해서는 두 책을 대조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단적인 증거를 제시하겠다.


에티카 제1부 끝부분에 부록이 있는데, 강두식, 김평옥 두 분이 그 부분을 번역하면서 실수로 한 문장을 빠뜨렸다. 그런데 강영계 선생도 오묘하게 그 부분에서 같은 실수를 하며 그 문장을 누락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강영계 선생의 에티카번역; (제1부 부록의 앞부분에서);  ... 신의 절대적 본성이나 신의 무한한 힘에 의한다는 것 등의 성질을 설명하였다. [여기서 한 문장이 누락되었음]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편견이 남이 있어서,,,,,,


강두식, 김평옥 두 분의 에티카번역; (제1부 부록의 앞부분에서)... 神의 절대적 本性 또는 神의 무한한 能力에 의한다는 것······ 그러한 여러 가지의 특질을 설명했다.  [여기서 한 문장이 누락되었음] 그러나 아직도 적지 않은 편견이 남아 있어, ········


누락된 문장; 더욱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나의 증명들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편견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부분에 대한  황태연의 번역;·····모든 것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데, 의지의 자유나 절대적 재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절대적 본성 또는 무한한 능력에 의해서 그러하다는 것 등을 설명하였다. 더욱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나의 증명들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편견들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물들의 연결을 내가 그것을 설명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장애물이었고, 지금도 장애물인 상당수의 편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여기서 ·····.


강두식, 김평옥 두 분이 실수로 한 문장을 빠뜨린 바로 그 부분에서 오묘하게 강영계 선생도 역시 그 문장을 빼먹은 이유는 어떤 것이겠는지, 상상력과  판단력이 엉터리가 아닌 사람은 누구라도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한 번역

1. 제2부 정리 8의 주석에서 직사각형 (rectangle.)을 직각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명백히 오역이다.


그 부분에서의 강영계 선생의 번역; 예를 들면 원은 그 안에서 서로 교차되는 모든 직선의 선분으로 형성되는 직각이 서로 동일하다고 하는 본성을 가진다.·······


모든 직각들은 서로 비교하고 말 것도  없이 다 동일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원 안에서  형성된 두 닮은 꼴 삼각형들의 성질에 관해서이다.


이 부분에 대한 황 태연의 번역;  원은 그 안에서 교차하는 모든 직선의 선분들로 이루어지는 직사각형들이 서로 같다는 본성이 있다. 그러므로 원 안에는 서로 같은 무한히 많은 직사각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


2. 제4부 정리 5를 보면,   각각의 열정의 힘과 그 증가···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서 열정은 라틴어passionis 영어 passsion과 같게 보고  열정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수동적 감정의 뜻을 갖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열정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정신이 작용을 받는 것을 의미하도록 사용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황태연의 번역; 리 5. 각각의 수동적 감정의 힘과 성장, 그리고 그것의 존재의 지속은 우리가 존재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능력에 의해서 한정되지 않고 우리의 능력과 비교되는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하여 한정된다.


3. 제1부 정리29를 보면, “사물의 본성에는 어떤 것도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작용하게끔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라고 나와 있는데 맨 앞에 있는 ‘사물의 본성에는’은 ‘도대체 자연스럽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에는’으로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같은 표현인 라틴어 In rerum natura를 강영계 선생은  ‘사물의 자연안에는’(제1부 정리5에서)이라고 번역했다가, 또 어떤 때에는 ‘사물의 본성에는’(제1부 정리 29에서)이라고, 또는 ‘자연의 사물 안에’(제4부 부록 제8항에서)라고 번역했다.  

In rerum natura은 영어로는 In nature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데 너무 어렵게 생각한 것 같다


황태연의 번역과 기존 번역과의 차이점


차이점이 많지만 두 가지만  언급해 보겠다.


1. 기존 번역에서 ‘명석 판명한 관념’이라고 번역한 것을 황태연 번역에서는 ‘뚜렷하고 명확한 관념’이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영어로는 clear and distinct idea이고 라틴어로는 claram, et distinctam  ideam 인데 한국의 철학자들은 현학적이고 일반인들이 잘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의미도 애매한 ‘명석 판명한’이라는 표현을 애용한다.


‘명석 판명한’을 최초에 쓴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참 현학적이고 이상한 표현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개념도 아니고 용어도 아니고 그냥 형용사일 뿐이고, 강조하느라고 비슷한 단어를 두 번 반복한 것에 불과한 것이 무슨 중요한 개념이나 용어인 것처럼 다루어졌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흔히 나오는 말이 데카르트가 인식의 문제에서 중요시하고 즐겨 사용한 표현이라고 하는데, 데카르트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그것은 용어도 개념도 아니고 형용사일 뿐이다.


2. 기존 번역에서 ‘자극하다’와  ‘자극되다’로 번역한 것을 황태연 번역에서는 ‘자극하여 변화시키다’와 자극받아 변화되다‘로 (새로 표현을 만들어서) 번역했다. 이것은 영어로는 affect로 표현되고, 라틴어로는 affectus 로 표현되는 것이다. 나는 그 affect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해서 제2부 정리 13의 뒤에 나오는 요청 5에서 설명된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  이 affect는 나중에 여러 감정들이 생기는 과정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감정은 인간의 신체(특히 뇌)가 자극받아 변화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데, 어떤 때에는 자극받아 더 좋게 변화되고, 또 어떤 때에는 자극받아 더 나쁘게 변화되어 기쁨 또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 감정이 되는 것이다.  자극만 받는 것과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또 능동형으로 쓰일 때에는 ‘자극하여 변화시키다’가 되는데, 이것은 어떤 감정을 발생시키는 것을 말하는 표현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한국의 철학교수들이나 철학박사들은 스피노자의 철학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주장이나 해석을 참고하기는 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여 스피노자의 사상을 연구하지 않는다. 나는 또 이 지구상의 스피노자를 연구하는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학자도 추종하지 않는다.


한국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외국의 스피노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적당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도 스피노자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추종이 대상이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와 같은 책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배우려면 잘 이해한 사람에게 배우든지 말든지 해야지 자기도 이해를 못해서 용어분석이나 하는 사람에게 무슨 수준 높은 것을 배우려 한단 말인가?


나는 스피노자도 추종하지 않는다. 나는 스피노자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자연)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철학자라는 것을 알고 크게 매력을 느껴 열심히 연구하며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는 것뿐이다.


나는 스피노자를 충심으로 존경하고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배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저술들을 아주 정성들여 번역하기도 했다.


 스피노자가 소중히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했던 것들을 나도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공통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서 원하고 추구하는 것들에 있어서도 공통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와 닮은 스피노자를 소중히 생각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존엄과 진정한 만족을 원하고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와 공통적인 것들을  원하고 추구했던 스피노자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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